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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May 14. 2022

슬기로운 돌봄 생활 2: 걷기 예찬

'이사도라'가 된다면

이십 대 중반, 나는 춤을 추었다. 늘 시간에 쫓기는 방송작가 생활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춤을 배우러 다녔다. 여러 종류의 춤을 취미로 배웠지만 재즈 댄스를 제일 오래 했다. 좋아하는 강사의 수업을 들으러 학원 두 개를 수강하고, 하루 세 시간씩 춤을 춘 적도 있다. 재즈댄스에 빠져 살던 당시, 가장 흠모하는 인물은 ‘현대 무용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사도라 덩컨이었다.     

 

이사도라 덩컨은 고전 발레가 전부였던 시절, 최초로 창작무용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미국의 무용가이다. 그녀가 1977년생인 나보다 딱 백 년 전인 1877년 5월에 태어난 것도 나에겐 운명처럼 다가왔다. 이사도라 덩컨은 1899년 시카고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당시 발레의 필수 복장이던 토우 슈즈와 타이즈를 벗고, 맨발로 무대 위에서 새로운 춤사위를 선보였다고 전해진다. 평생 자유를 갈망했다는 그녀의 춤과 생애가 열정과 반항심으로 가득 찼던 청춘의 나를 매료시켰다.      


얼마 전 혼자서 엄마의 별명을 지어보았다. ‘이사도라 순옥’이다. 입에 착 붙고 듣기에도 근사하지 않은가! 엄마에게 이런 별명을 지어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나의 춤 사랑은 엄마에게 대물림받은 것이다. 코로나 19의 후유증으로 아직 댄스 학원으로 향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엄마는 언젠가 다시 취미로 춤을 추겠다는 포부를 다지고 있다.        


엄마에게 이사도라 덩컨의 이름을 수식어로 붙인 또 다른 이유는, 요즘 엄마의 하루는 걷기로 시작해 걷기로 끝나기 때문이다. 아마 나와 비슷한 시기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이사도라’라는 별명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교사들이 수업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라도 하듯 24시간 복도를 누비며 걸어 다니는 교감 또는 교장 선생님을 이렇게 불렀다. 학교마다 ‘이사도라’가 한 명씩은 있었다.  


엄마의 하루는 옛날 교감 선생님의 일과와 다르지 않다. 새벽에 일어나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하고 약을 한 움큼 챙겨 먹고 집을 나선다. 집에서 걸어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하천으로 직진한 후, 하천을 따라 한 시간을 또 걷는다. 집으로 돌아오면 꼬박 두 시간 코스의 걷기 운동이 끝이 난다. 낮에는 병원 치료나 은행 업무, 장보기 같은 일과들을 처리한 후,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러다 해질녘이 되면 엄마는 다시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거리로 나온다. 이때는 아침의 코스보다는 짧은데, 한 시간 가량 집 근처 골목을 돌거나 큰길 건너에 있는 공원을 한 바퀴 산책한다. 하루 종일 걷기에 진심이니 ‘이사도라’라는 별명이 딱이지 않은가.     


가끔 다른 가족들이 걱정이 된다며 내게 문자를 보낼 때가 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계속 받지 않는다며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초조해한다. 나는 당황할 것 없다며 안심시키고, 지금은 엄마의 운동 시간이며 이 시간만큼은 방해하지 말라는 엄마의 공지사항을 전달한다.      


코로나 19 회복 이후 엄마가 운동을 하러 나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나는 모자와 작은 크로스백을 선물했다. 모자는 햇볕을 막는 용도도 있었지만 아직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엄마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보호막이 되었다. 크로스백에는 언제 어디서든 나와 연락이 닿을 수 있도록 핸드폰과 비상금을 꼭 넣어 다녔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걷기의 즐거움을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며 엄마는 모자도 쓰지 않고, 핸드폰이나 가방도 벗어던진 채 집을 나선다. 모자를 쓰면 매일매일 달라지는 자연의 변화를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없고, 가방 끈이나 핸드폰의 무게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몸을 속박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엄마를 알아보는 동네 사람들의 눈길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웃으며 인사할 용기도 생겼다고 한다. 몸과 마음의 자유를 얻은 엄마는 진정으로 걷기의 즐거움에 빠진 것 같다. 이사도라 덩컨이 자신을 구속하던 토우 슈즈와 타이즈를 벗고 무대 위를 뛰어올랐을 때 느꼈을 해방감을 엄마도 걷기라는 행위를 통해 비슷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한동안 엄마를 돌보는 일상으로 지쳐있던 나를 일으킨 것도 걷기의 힘이었다. 엄마의 회복에 속도가 붙어 혼자서 일주일을 거뜬히 보낼 수 있게 되자 나도 동네 산책을 시작했다. 나의 걷기는 엄마의 걷기와는 조금 달랐다. 엄마의 걷기는 일상 회복을 위해 좋은 습관을 만들고, 몸과 마음의 근육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나의 걷기는 기존의 내 생활과 돌봄 노동 사이를 오가며 긴장한 몸에서 힘을 빼고 가슴에 뭉쳐있던 응어리를 풀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나의 걷기는 때에 따라 속력과 방향을 달리했다. 느긋하게 걷고 싶은 날은 뒷짐을 지고 선비처럼 이 골목, 저 골목을 굽이굽이 누볐다. 잡념을 떨쳐내고 싶은 날은 빠르게 걸으며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평지 코스를 선택했다. 그날의 기분과 컨디션에 따라 나아갈 길을 정하는 선택의 자유가 나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장 자크 루소가 남겼다는 문구가 붙어있다. 마치 걷기를 대하는 나의 진심을 대변하는 글 같다.      


“나는 거리를 산책했다. 행복했다. 책을 읽었다. 한가로웠다. 가는 곳마다 행복이 나를 뒤따랐다.”     


위대한 사상가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던 나에게도, 다시 살아갈 힘을 길러야 했던 엄마에게도 걷기는 자연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행복의 묘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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