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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가 배롱나무, 붉은 숨 식고 가을 그림자 물어오네.

사랑은 이렇게 피고 진다 : 연작 (5)

by 헬리오스


연못가 배롱나무,

붉은 숨 식고 가을 그림자 물어오네.

사랑은 이렇게 피고 진다 : 연작 (5)



그 해 여름, 마을 어귀 배롱나무 붉디붉은 꽃이

저 하늘빛 더위를 부채질하듯,

흔들흔들, 부르르 떨며 피어났네.


꽃잎은 하룻밤 설움도 모른 채

달궈진 바람에 몸을 맡기고,

아침 해에 벌겋게 달아올라

사람 마음 불쑥불쑥 뒤흔들었지.


그때 내 가슴속에도

불길 같은 님이 들어와 앉았네.

이리 오너라, 저리 가자.

손끝 스치면 등줄기 타들고,

웃음 한 번이면 속살까지 푸욱 젖어드네.


여름 햇볕은 사정없고,

장마비는 질퍽질퍽 우리 발목을 잡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좋았네.

장터의 북소리보다 크고,

밤바다 파도소리보다 깊던 님의 숨결,

그 숨결에 취해 이 세상 다 잊었네.


허나 세월이란 게 원체 무심한 놈,

한바탕 불길도 재로 식히고,

배롱꽃도 바람결에 하나둘 흩어지네.

그 붉음이 질 때

내 사랑도 저리 가는가 싶었지.


이제는 멀리서 본다,

그 여름, 그 꽃, 그 뜨거운 날들.

목청 터져 부르던 내 사랑도

판소리 한 마당 다 끝난 듯,

고수의 북가락만 멀찍이 메아리로 남았네.


허나, 허나,

이 심장 한구석은 아직도 그 붉은 빛을 품고 있네.

배롱나무 꽃잎이여,

다시 한번만,

그 여름의 불길을 내 가슴에 지펴다오.


#배롱나무 #배롱나무꽃 #여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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