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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매이 Sep 03. 2024

해고자 아이디어로 프로그램 개편을?

시청률 하락 때문에 메인작가 교체라더니

방송일의 무수히 많은 단점 가운데 하나는 영영 안 보고 살고 싶은 회사나 사람을 어쩔 수 없이, 그것도 내 집안에서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한동안 해당 시간대에 TV를 켜지 않았다.

그러다가 해고당하고 한 달여쯤 지난 어느 날, 채널을 돌리다가 나를 해고한 팀에서 제작한 방송을 보게 됐다. 출연자에게 질문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 '그러면 다들 촬영 안 갈 거지? 나도 스케줄 취소하겠다.'고 말하던 그 피디다. 바로 채널을 돌리거나 TV를 끌 수도 있었지만 멈춘 건, 지금 나오는 코너가 어딘지 익숙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해당 방송 홈페이지에 들어가 내용을 살폈다.

아, 역시나.... 수개월 전 내가 팀에 공유했던 코너 개선안에 있던 그 코너였다. 하나도 아닌 두 개나.

하나는 내가 아이디어를 내면서 '타이틀은 고민 중'이라고 적었던 것이라 코너명을 그들이 새로이 정한 듯했지만 다른 건 내가 개선안에 적은 코너명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대단히 독창적인 코너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내가 00을 봤는데 이런 아이템이 주목도가 높은 것 같다, 해보고 싶다' '이런 코너를 생각해 봤는데 유튜브에 비슷한 채널이 있더라'고 영상도 보여주며 거푸 피력해 온 아이디어였다.


나를 그렇게 해고하고 내 아이디어로 개편을 한건가?

아니 그런데 처음 나에게 사직하라 압박할 때 제시한 사유가 분명 '시청률 하락'의 책임을 지라는 것 아니었나?


오늘 임원 회의에서... (중략)

메인 작가님 교체 의견이 있었습니다.

시청률 하락과 서브 작가 잦은 교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지금 들어온 000작가는... (후략)

          - 5월 2X일, 팀장의 카카오톡 메시지


제작사가 방송사와 맺은 프로그램 외주 제작 계약을 연장하는 데에는 시청률이 거의 절대적 기준이 된다. 그러니 외주 제작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청률에 약간씩 미쳐있다.

팀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청률이 비교적 안정적일 때도 '하락하면 000(상사)의 간섭이 심해질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힘들어진다.'고 위기감을 더했고 시청률이 더 떨어지자 '0월까지 시청률이 오르지 않으면 내가 그만두겠다.'라고 하기도 했고, 심지어 타 제작사에서 수년간 일하고 그만두는 제작진에 대해서도 '시청률 때문에 겸사겸사 바꾼 것이다.'라고 했다.


거기다 나는 업무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 회사가 유독 메인 작가 교체가 잦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어 그만뒀겠지만, 이러한 신호들이 합쳐져서 나는 '시청률이 안 나오면 잘리는구나'라는 불안을 내내 안고 일했다.


그래서 팀장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처음엔 드디어 그날이 왔다, 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시청률도 팀 운영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잘리는, 저성과자의 수치심이 컸다.


그러나 알고보니 그런 임원 회의는 없었다.

팀장은 본인이 내부 회의(대체 '내부'의 범위는 어떻게 될까)에서 메인작가 교체를 건의했다고 이후 시인했다. 그 이유가 시청률 하락 외에도 본사에서 아이템 참신성 등 따로 체크하는 게 있는데(금시초문이었다) 거기서도 우리 팀이 최하위라서 회사로 본사의 압박이 왔기 때문이라고도 덧붙였다.


회사의 E국장도 팀장과 의견을 같이했다.

나의 요청으로 처음 만난 자리에서 E국장은 시청률을 걱정하면서, 어쨌든 위기에는 MC든 스태프든 교체하는 게 이 업계에선 흔하지 않으냐고도 했다.


이후 노조를 통해서 회사 측과 대화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화난 얼굴로 달려온 E국장과 두 번째 면담을 하게 됐다.

2화에서 언급했듯 예고 없이 그 자리에 동석한 A피디는 '메인작가가 노조 이야기하니까 작가들이 더 무서워서 말을 못 한다.'라거나 ‘피디들은 메인 작가랑 같이 일 못 한다’ '원하면 딴 일 구할 시간 주고 나가는 쪽으로 합의했으면' 등의 주장을 이어갔다. 맞은편에 앉은 E국장은 '어쨌든 제일 중요한 것은 시청률.' '시청률 올리는 게 우리의 급선무'라는 말만 계속했다.


방송하는 사람들에겐 시청률은 성과의 다른 말이자, 신이니까.

시청률을 명분 삼으면 과도한 경쟁도, 반인권적인 취재도, 공공의 전파로 쓰레기를 퍼뜨리는 것도, 누군가의 생계를 끊어놓는 것도 모든 게 가능한 곳, 그게 방송국이다.


E국장, 팀장, A피디까지 세 사람 앞에 나는 홀로 앉아서, 내가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라는 주장에도 반박하고 일자리를 잃기 싫다는 것도 어필해야 했고 또 왜 시청률의 책임을 내가 져야 하냐고 항변까지 해야 했다. 물론 내 판단력과 말재주가 부족해 셋 다 잘 해내지 못했던 것 같다.


혼란에 빠진 나는 E국장에게 '내 거취 문제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E국장은 답했다. "그건 제가 판단할 수 없죠. 작가님이 선택해야 할 것 같아요."


해고는 없다, 그냥 스스로 나가라.


돌이켜 보니 그날, E국장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아끼던 팀장이 '메인작가와 잘 이야기하고 좀 더 나은 코너도 만들어야 했는데 모두 내 책임이다.'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E국장이 신규 코너를 당장 기획해야 한다고 팀장을 다그치자, 알겠다고 호응하던 것도 기억난다.


그렇게 나를 해고하고 직후 만든 새 코너가 그거라니.

참… 염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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