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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매이 Sep 10. 2024

스스로 그만 두지 않으면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회사

웃을 수 없는, 충격 실화 오피스 코미디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팀장이 내게 한 말이다.


협박이란 무엇일까.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형법상의 협박죄란, 대충 '네가 OO 하지 않는다면 나는 XX를 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상대방이 어떠한 일을 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팀장에게 무얼 강요하거나 위해를 가하겠다고 암시했던 걸까.


'시청률과 서브 작가진 교체'를 명분 삼은 사직 종용을 받은 지 열흘쯤 지나서 출근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작가실을 찾아온 팀장은 "(나에 대해) 들려오는 소문이 있다."라거나 "피디들이 메인작가를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무슨 소문이냐고 하니, "내가 알아서 판단한다"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피디들이 왜 나를 신뢰하지 않느냐고 물어도 "그건 나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팀장과의 대화는 늘 그랬다. 한번은 작가들이 방송 전날 잠잘 시간이 거의 없어 힘들다며 시사 시간을 당겨달라고 내게 요청한 적이 있다. 팀장과 의논해 보려 했지만 돌아온 답은 "피디들이 작가들에 대한 불만이 많아요."였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이날도 팀장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더는 말을 섞어볼 열의가 생기지 않아, 내 입장을 빠르게 전달했다.

"나는 그만둘 생각이 없다. 노조에 이 사실을 알렸고 다음 주중에 노조에서 회사 측에 내용증명 형식으로 공문을 보낼 것이다. 앞으로는 노조가 사측과 대화를 할 것이니, 그냥 우리는 일이나 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팀장은 벌에 쏘인 사람처럼 작가실을 빠져나갔다.


얼마 뒤에 다시 작가실 문 앞에 등장한 팀장이 한 말이,  "지금 협박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대체 뭐가 협박이란 말인가. 공문 보내기 전에 미리 알려주는 편이 낫지 않냐고 하자, 이번에는 "같이 일하자면서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나를 책망했다. 아니, 좀 전까지 나가라고 나를 몰아세웠던 팀장 아닌가. 그 말과 행동 어디에 같이 잘 일해 보자는 뜻이 있었다는 건가. 내가 황당해하고 있는데 다시 어디론가 급히 갔던 팀장이 돌아와서 회사의 E국장과 면담이 잡혔음을 알렸다.


3화 [해고자 아이디어로 프로그램 개편을?]에서 언급한 E국장과의 두 번째 면담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E국장도 팀장 못지않게 화난 얼굴로 찾아왔다. 사무실 게시판에 노조 소식이 붙어있는 걸 자주 봤는데, 자사 정규직의 노조가 아닌, 비정규직 작가의 노조는 불편했던 모양이다. 역시.


그 후, 2화에 썼듯 여러 일들이 벌어졌다.

피디들이 시사 보이콧을 한다고도 했고 내가 그만두지 않으면 당장 다음 주 방송 제작을 거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작가들에게 '그럴 거면 정규직 하지 그랬냐.'는 말도 들었지.

"노조에서 대리해서 사측과 대화할 것이다."라는 나의 말과 "네가 그만두지 않으면 우린 촬영 안 가겠다."는 피디들의 말 중에 뭐가 더 협박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이거 참... 멀리서 보면 한 편의 오피스 블랙 코미디극이었지만, 불행히도 나는 극의 관객이 아닌 등장인물이었다.


결국 난생처음 정신과를 찾았다.

진료 후 수납하는데 하필 E국장의 전화가 걸려 왔다. 순간 심장이 크게 쿵쾅거렸다. 병원이라 통화를 할 수 없으니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메시지를 보냈는지 전화를 직접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며칠 뒤, 다시 전화를 걸어온 E국장은 '좋게 마무리하자'고 계속 자진 퇴사를 종용했다. 나는 이미 팀원에게 폭언한 가해자가 되었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으며, 팀장에 따르면 외부에 안 좋은 소문까지 났다는데, 거기에 더해 일자리도 잃으면 대체 내게 무슨 '좋은 마무리'인가, 알 수 없었다.


E국장은 말했다.

"(다른 프로그램 가서) 제작 안 하실 거예요?"


팀장도 소문 운운하더니, 또.

내가 이 프로그램을 그만두는 것과 다른 프로그램에서 방송작가로 계속 일하는 게 무슨 상관이냐고, '이 회사도 앞으로 작가들 뽑아야 하는데 나한테 이래도 되냐.'고 되물었다.


E국장과의 통화 다음 날, 집으로 등기우편이 도착했다.

봉투에는 인쇄된 회사 주소 옆에 대표의 이름이 볼펜으로 적혀있었고 문서에도 대표 직인이 들어가 있었다.

요약하면 나는 '폭언' '이간질' '괴롭힘'의 가해자였다. 나 때문에 팀원들이 나가고 사기가 떨어져 프로그램 완성도가 저하되었고 시청률이 하락해 회사가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해당 문서에는 폭언, 이간질, 괴롭힘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나와 있지 않았다. 나중에 보낸 해고 통지서에 폭언, 괴롭힘 사례가 보다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는데 내가 편집실에 들어오면서 한숨을 쉬었다거나, '이건 왜 이렇게 붙였냐'고 말해서 모멸감을 줬다, 등이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나는 문서를 읽어나갔다. 회사는 나와의 계약해지 '합의'를 원했다.

만약 내가 거부하면?


수신인이 본 내용증명 우편을 송달받은 날로부터 7일 이내에 해지 합의 또는 관련 협의에 관한 의사를 표시하지 않을 경우, 당사는 이 사건 계약 제6조 제1항 3,4,6호에 의거하여 이 사건 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이 경우 이 사건 계약에 따라 수신인의 계약 의무 위반으로 인해 발생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예정입니다. 끝.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건가요?"

정말이지, 이건 누가 할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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