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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매이 Sep 13. 2024

해고 2개월 차, 백수의 나날

절망에 고여있고 싶진 않지만

해고당하고 두 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일 없이 하루하루 살아보니, 역시 사람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구나, 싶다.

그렇다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고 특별히 다른 목적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세상에 나왔으니 즐겁게 살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일자리를 잃은 대신 얻는 건 남의 간섭 없이 온전히 쓸 수 있는 하루 24시간. 덕분에 나 자신과도 세상과도 딱히 불화할 일이 없어 잔잔하고 평화롭다.


적당한 시간에 일어나서 '아침'이라고 명명한 다음 청소기를 돌리고 현관, 주방, 욕실 앞 러그를 한 번 털어 자리에 놓는다.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물그릇과 밥그릇을 닦아준다. 그런 다음, 커피 한 잔을 내리고 TV를 켜면 그대로 한두 시간이 흘러간다.

이사 온 지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동네 도서관을 가봤다. 그동안 흥미가 생기는 책이 있으면 일단 사두고 읽지 않는 출판계의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었는데 수입이 끊기자, 발이 부지런해졌다.

늦은 오후가 되면 일기예보를 보면서 오늘은 달리기를 할지, 수영장을 갈지 고민한다. 경기도로 이사 오면서 도서관이나 수영장이나 큰 공원이나 모두 버스를 타야 할 만큼 멀어진 게 좀 아쉬웠다. 그러다 어차피 어디든 버스를 타야 하니, 아예 더 먼 지역의 수영장까지 놀러 가기도 했다.

그렇게 새로운 수영장에 다녀오면, 당근 라페 한 병을 만들어 두면, 첫 15km 달리기를 완료하면 나를 미워하지 않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


물론 영원히 계속될 수 없는 일상이다.

수입이 없을 때 굶어도 괜찮은 몸을 타고난 것도 아니고 내 사정을 고려해서 전세자금대출 이자나 전기요금이 감면되는 것도 아니다 보니, 통장 잔고가 줄어들면 그만큼 불안이 커진다.  


하지만 아직 다음 한 걸음을 어느 방향으로 두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불행, 불운, 절망, 실패와 마주칠 때마다 내가 택한 방법은 '어디로든 빠르게 달아나기.'였다. 회피, 와는 좀 다르다. 살면서 가족과의 일을 제외하고 내게 가장 깊은 절망을 안겨 준 사건은 노동조합 활동이었는데 처음 조직을 '두고' 나와야 했을 때도 나는 엉엉 울고 바로 다른 활동을 준비했었다. 나중에 그조차도 못 하겠다고 뛰쳐나왔지만 곧바로 성폭력 사건 재판 방청 연대 등 익명의 개인 연대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늘어두니 무슨 본투비 운동권 같지만 사실은 그냥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다.) 새로운 업무, 새로운 몰입 덕분에 좌절과 열패감을 빠르게 잊을 수 있었다.


나는 넘어진 자리에 마음을 묶어두고 억울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억울해서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억울하기만 한 사람. 자기연민이라는 함정에 빠지면 세상도 나 자신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워진다. 불쌍한 나의 응석을 한없이 받아주고 싶어져서 주저앉게 된다. 과거를 곱씹다가 나에게도 남에게도 해로운 행동을 반복하게 만들까봐 무서웠다.

괜찮은 척하다 보면 괜찮게 된다니까, 빨리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뇌도 안 좋은 일은 기억 저편으로 묻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다만 빨리 잊다 보니, 그때 그 시절 인물들을 마주쳤을 때 그들이 한 짓을 다시 떠올리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려 분노할 타이밍을 놓치고 뒤늦게 내 머리를 쥐어박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노조 관련 활동을 그만두고 한두 해 지난 후였던가. 약속 자리에 나갔는데 예정에 없던 '그 노조'의 인물이 동석해 있었다. 하하 웃으며 술자리를 끝내고 와서 며칠 아팠다. 왜 나에게 묻지도 않고 저 사람을 불렀을까, 저 사람은 무슨 낯으로 내 앞에 앉아 있는 거지? 몇 달을 준비한 업계 실태조사 발표를 방해하고 지자체 지원 사업도 가로채려 했는데 지나간 일이니 마주 앉아서 웃어야 하나? 그 자리에서 멱살이라도 잡고 물어야 했는데 내가 바보였다. 한참 뒤에 아문 줄 알았던 상처가 뜨거워져서 내가 아직 아프다는 걸 알았다.

이번 해고를 겪으면서도 그때의 실패를 자꾸 되짚게 된다. 이런 게 일종의 트라우마일까.


지금도 나는 괜찮지만 사실 괜찮지 않다. 일상은 잘 굴러가지만 두 발은 늪에 빠진 채로 오도가도 못 하는 기분이다. 내 실패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역시 나는 그럴만한 그릇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닿아 더욱 기력을 잃는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주변인, 가끔 용기 내어 연대자 정도로 살아왔는데, '당사자'의 삶을 전혀 몰랐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내 앞의 숙제를 의연하게 풀어 나가야지, 결심했는데 나는 너무도 하찮고 비겁하며... 아, 정말 이제 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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