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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의 무게

NY #1. Penn Station, Highline Park

by 정동


기대하지 않고 여행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기대란, 품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또 품었던 대상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를 가져온다.


뉴욕, 정확히는 뉴욕시티, 즉 맨해튼에 대한 나의 기대를 음악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드보르작의 ‘신세계로부터’ 교향곡을 들고 싶다. 영화 <죠스>의 주제곡과 매우 유사한 도입부를 가진 그 곡을 떠올린 배경에는 사실 약간의 오해가 있다. 고등학교 때 음악선생님께선 유럽 태생 드보르작이 뉴욕에서 여태껏 본적 없는 미국식 신도시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이 곡을 지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사실, 이 곡은 작곡가가 뉴욕에서 고향 보헤미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곡이라 한다. 그래선지 제목도 신세계'로부터’다. 쾅쾅 내리짓는 도입부를 지나면, 도시가 아닌 동유럽 어느 지방의 강물과 들판을 연상시키는 듯도 하다. 다만 별천지 뉴욕을 묘사했다는 썰이 설득력 있는 건, 역동하는 자연의 모습처럼 뉴욕의 기저에도 강한 해류들이 흐르기 때문 아닐까.


어쨌든 나는 뉴욕에 도착하는 즉시, 섬뜩하면서도 압도적인 교항곡이 마음에서 들릴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얼마만큼 다양하고 혼란스러우며 유별난 곳일까, 얼마만큼 혼을 쏙 빼놓을까?


도착 당일 아침, 나는 좁은 비행기 안에서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고 모든 로망을 뒤로 하고 숙소 침대에 드러눕고만 싶었다. 피곤함보다 무서운 허기를 일단 달래보고자 먹는 아침마저도 부질없는 비상연료 같았다.


하.지.만. 그때 카페 창밖에 뉴욕의 모습이 보였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뉴욕이 지척에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자, 눈꺼풀은 한순간에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내가 품은 수많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결국 맨해튼으로 향했다.





1. Penn Station의 회색빛



매디슨스퀘어 바로 옆 펜 스테이션을 나왔을 때, 플라톤의 동굴을 나온 사람이 된 것마냥 새로운 광명을 찾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조명이 어두워 동굴같은 역에서, 역보단 밝아도 여전히 회색빛인 도시로 걸어나왔을 뿐. 역 계단은 이곳을 역이 아닌 대법원이라 믿게도 만들만큼 거대했지만, 그 회색빛에선 드보르작의 교향곡은 들려오지 않았다.



실망을 하지 않아서 오히려 실망할 정도로 뉴욕은 사진과 영화에 등장하는 것과 똑같았다. 그 와중에 나는 약간의 우스꽝스런 이명을 느끼고 있었는데 전부 뉴욕의 건물들 때문이었다. 맨해튼의 건축물은 전부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 석상, 거대블록이었다. 바라볼 때마다 무슨 소리가 목구멍까지 들어차나 했더니, 마인크래프트에나 나올법한 공사 효과음이었다. 깎아지른 검은 유리창의 산, 그 산은 이 도시에 서 있는 사람 모두를 비롯해 자기 자신들까지도 앞뒤로 감싸는 동시에 채우고 있었다.


아직 난 이 도시의 색을 알 수가 없었다. 뭔가 희끄무레하면서 거무튀튀하긴한데, 그러면서도 노란 택시와 알록달록한 행인들의 옷 때문에 쨍쨍한 원색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먹구름 낀 듯 답답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비행기 위 창공처럼 탁 트인 듯한 풍경.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뉴욕은 마치 빠리처럼 안갯속 가로등불이나 레스토랑의 샹들리에를 떠올리게 하는 도시는 아니었다. 이 도시는 멜랑꼴리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해서 쁘티 프랑스처럼 보는 사람이 부끄러울 지경도 아니었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형할인마트처럼 영혼 없이 돌아가는 곳도 아니었다. 만약 뉴욕을 직업에 비유한다면 작두 타는 무당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촌스러운 짝퉁과 화려한 고전예술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데 그치지 않고, 신기를 받아 어떤 경지의 길로 나아가는 무당. 건축과 도시에 대해 깨알만한 지식밖에 없는 나에게 ‘도시’로서의 뉴욕의 모습이었다.





2. Highline Park 그리고 소중한 만남


때로는 아주 작은 돌이 거대한 파문을 일고 온다.


내가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딱 그랬다. 어느 대학 공강 시간, 도서관에서 시간을 어떻게 때울까 궁리하다, 건축책이나 한번 읽어볼까하는 마음으로 예쁜 모던 하우스들을 다룬 책을 고른 일, 그 단순하고 사소한 일은 지금 내 SNS 피드를 도배하는 건축 계정들로 이어졌다.


예쁜 건축에 대해 알아보다보니 좋은 건축이 뭔지 귀동냥을 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어떻게 하면 '도시'를 더 좋게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쓴 글과 영화를 봤다. 그런데 사람들이 좋은 건축, 좋은 도시재생의 사례로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하이라인 파크였다.


2017년 개장한 서울로7017이 하이라인 파크를 벤치마킹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하이라인에 대한 관심이 부쩍이나 늘었다. (아, 하이라인 파크도 조상이 있다. 다름 아닌 파리의 프롬나드 데 플랑트다. 이번에 하이라인 파크를 들르면서 운좋게 고가도로 재생 3종세트를 다 보게 된 셈인데, 뉴욕의 경우에는 주변 건축물의 양식이 더 근시기의 것들이라, 수풀에 가려진 프랑스풍 주택을 볼 수 있는 파리의 길과는 풍경과 느낌이 꽤나 색다르다.)



하이라인 파크는 주로 네모꼴의 가장자리를 지녀 가장자리에서만 주변 빌딩들 볼 수 있는 공원들이 주된 맨해튼에서, 좁디 좁은 건물 사이를 나무와 풀이 빼곡한 길을 통해 가로질러 가다보니 '도심 속의 휴식'이란 표현이 더 와닿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잔디밭이나 완만한 언덕 어딘가에서 자켓을 깔고 낮잠을 잘 수는 없지만, 천천히 걸으며 저 도시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느낌을 선사하는 공간인 것이다.


파리와 뉴욕의 두 공원은 공통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이 두 도시의 재생 사례가 서울로7017과 판이하게 다른 평가를 받는 것은 결국 '사람'을 얼마나 배려했는가의 여부에 따른 것이라 생각한다. 예쁜 집 카탈로그와 같았던 그 첫 건축책에서도 누누이 강조하는건 결국 공간을 살아갈 사람이었다. 서울로7017이 보행자를 배려하지 않은 디자인과 여타 다른 이유로 도심 속 쉼터의 장점을 살리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비판받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유난히 휴대폰으로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아마 같은 관심 분야를 가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건축책을 찾아 읽기 시작하던 즈음, 건축과 지역재생에 관해 좀더 귀동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글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나는 지역 웹매거진에 참여했었다. 1주일에 한번 씩 회의를 열었는데, 만나면 우리는 꼭 근황토크란 것을 했다. 말 많은 성격의 나는 이 자리가 아주 좋았고, 나중엔 근황토크를 위한 소재거리를 일부러 기억해두기도 했다.


그렇게 근황토크로 다져진 친목은 나를 꽤나 오래 괴롭혔던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영화밖에 모르던 내가, 어느날 건축책을 집어들고 관련된 곳에서 글을 써보길 원했던 작은 마음이 소중한 인연으로까지 발전한 것 또한, 그래서 꿈에 대한 좌절을 조금이나마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이 하이라인파크에서의 회상으로 끝나는 한편의 뿌듯한 드라마가 아닐런지.



공원을 죽 따라 걷다보니 빌딩 사이로 허드슨 강이 보였다. 뉴저지와 맨해튼 사이를 흐르는 이 강은 내가 일주일동안 지겹도록 버스를 통해 오고가야하는 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난 그 강의 이름도, 모습도 좋았다. 비단 영화 <설리> 속 기적의 현장이어서만은 아니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았던 아침과 저녁의 맨해튼은, 마치 누군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인사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안녕' 그리고 '안녕.' 여행하는 매일 그 도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지금보면 또다른 행운이었던 것 같다.





3. 카메라는 넣어두고


어릴 때부터 카메라를 좋아했다. 교복 입던 시절까지도 한 손에 잡히는 은색 캐논 디카를 들고 이것저것 찍는 맛에 살았다. 교내 온갖 행사가 열리면 꼭 챙겨가서, 미처 카메라를 챙기지 못한 선생님들이 네 것좀 쓰자며 빌려가신 적도 꽤 됐다. 별의별걸 다 사진으로 찍었고, 영상은 가끔 모아서 기초적인 윈도우 무비메이커로 이어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학에 와보니 다들 전문적인 편집툴로, 더 성실하게 모은 촬영 소스들로 멋진 영상들을 선보이는게 아닌가. 그래서 나도 한번쯤은 때깔있는 영상을 찍어 보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찍고 픈 거리, 도시의 모습을 담은 여행영상 말이다.


그러나 이번 뉴욕 여행에선, 도착 첫날 관뒀다. 굳이 '있어보이는' 이유를 들자면, 만들고자하는 욕구보다 인정받고자하는 욕구가 더 컸기 때문이다.

오랜만의 여행을 그것도 꽤 오래 가고팠던 도시를 맨 눈으로 보고 느끼기도 힘든데, 굳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봐야한다는게 불만스러웠다. 그런 상태에서 남들이 내 영상 어떻게 볼지까지도 걱정을 했다. 내 스스로의 기대도 과하면 문제가 되는데, 남의 기대까지 업고가자면 더 큰 부담을 지게 되기 마련이다. 누구한테 인정받으려 했는진 모르겠지만 - 정말 그게 문제다 - 그 부담과 쪽잠 비행으로 인한 피곤에 가뜩이나 무거운 1kg짜리 내 카메라는 배의 닻 수준으로 무겁게 느껴졌다. 하이라인파크에서 친구들을 떠올리며 보여줄 사진을 찍을 때와는 셔터의 무게감이 달랐기에 급기야는 카메라를 내던져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여행을 할 때, 타인의 기대가 아닌 내 기대로만 걸어다닌다는게 썩그리 쉽진 않은 듯 하다. 만약 내 욕망대로 걸어다녔다고 해도 어쩐지 또 이걸 증명하고 싶기도 하고, 그 증명한걸 또 증명하고 싶어진다.


불현듯 첫 단편영화를 만들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다. 애초 소재와 각본은 엉뚱한 상상에서 시작한, 정말 재미로 만들고싶었던 작품이었는데, 만드는 과정 내내 나는 스트레스에 시달려야만 했다.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재능없단 소리를 들으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만성 불안 때문에 영상도 그리고 지난 여행도 누구에게 쫓기듯 해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편하지 않은 몸을 무시하고 '제일 좋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스스로를 감내할 수 있는 이상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그 결과로 따라온 것이 실수였고, 실패였고, 무책임과 도피 그리고 권태였던 것이다.


뉴욕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해야한다는 강박과, 부족한 잠 그리고 잠시 길을 헤맨 탓에 돋우어진 짜증은 나의 고질병에 더욱더 부채질을 해댔고, 난 결국 렌즈 뚜껑을 덮어버리고야 말았다.


DLSR카메라로 찍는걸 포기한 이후, 나는 다시 가방을 맡겼던 기념품 가게로 돌아왔다. 다시 본 타임스퀘어의 정신없음에 그래도 아까보단 적응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맑은 것도 아니요 흐린 것도 아닌 기묘한 날씨는 낯설기만 했고, 계속 들고 있던 카메라의 무게에 목과 어깨가 너무 뻐근하고 아파왔다.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예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도시 뉴욕의 공기가 애써 밝으려 하는 내 기분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던 때, 어디선가 똑 떨어진 한방울의 비 마냥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가게 카운터 뒤에서 어린 소녀가 장난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소녀는 무언가 자랑하려는 듯 장난감을 들어보이며 아빠를 불렀다. 그리곤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 소녀의 검은 눈동자 주위 눈살이 포개지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는걸 볼 때 나는 수업시간에 졸다 설핏 깨버린 듯했다. 비좁은 빌딩 블록의 우연한 배열이 만들어낸, 한줄기 연한 햇살의 투과를 엿보는 듯했다.

가방을 끌고 가게를 다시 나오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 소녀는 앞으로 무엇이 될까.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이 수많은 군중과 수많은 길과 건물 사이에서 단 한 명 이 소녀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누굴 만나고 어떤 장소에 가게 될 것인가. 그곳에서 얼만큼 웃고 또 얼마나 울게 될까. 뇌리에서 희미하게 풀려나가는 ‘이야기’의 실자락들을 헤치며 나는 타임스퀘어에서 멀어졌다. 그리곤 생각했다. 지금껏 카메라를 쓰는 모든 일을 미워해본 적 없지만, 또 앞으로도 그럴 수 없겠지만, 나에겐 사람 사는 여정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사진 찍는 것보다 조금더 흥미로운 일일거라고. 여행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보다,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이 겪은 한편의 이야기를 곱씹어보고, 그 이야기 안에 여행지를 멋지게 담아내는 것이 더 하고 싶은 일이 아닐까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소녀의 긴 인생, 그중 턱없이 짧은 하루 속 찰나의 순간을 본 것이 묻어둔 기억의 물꼬를 튼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이의 스토리를 그려보는 것만큼이나, 내 자신이 묻어둔 기억과 감정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떠올려보는 것도 일종의 여행이다. '보이는 것'을 자랑하고 예쁘게 포장하는 것은 내 어깨를 짓누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야기'는 그 무게를 덜어주는 거중기와 같다. 그것은 도심 속 작은 숲길이며, 그 숲길 속 작은 벤치이기도 하다. 소문이 아닌 이름, 이름이 아닌 얼굴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내 부담을 덜어낼 때 여행지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익숙해서 더 안다고 착각하고 그래서 더 실망하기 쉬운, 그럼에도 잊고 있던 가능성을 발견케하는 달콤하고도 쓰라린 '어떤 그곳'과의 인연 말이다.


이 격자형으로된 덕지덕지 복잡다단한 도시에 선 ‘나’와

이 도시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나쳤던 여러 순간들에 대해

비로소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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