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 #8. Elis Island
'이민자 박물관'의 존재를 언제 알게된건진 모르겠으나, 어쨌든 박물관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이곳을 꼭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민자'라는 말은, <대부2>의 어린 비토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했고, <좋은 친구들>에서 스스로가 아이리쉬 갱임을 한탄하는 지미 콘웨이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밖에도 더 많은 영화, <성난 황소>나 <브루클린> 그리고 최근의 <그린 북>까지, 이 낯선 도시에 발딛은 이민자들의 모습이 그려진 영화들 때문에 나는 엘리스 섬에 반드시 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5년 전, 아직 대학 새내기의 1학기도 채 안 지났을 무렵,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날따라 볼 영화도 안정하고 무작정 서가를 구경하다, 순간 눈에 들어온 '끌리는 제목'의 DVD를 골랐다. 이 영화를 어찌나 감명깊게 봤는지, 나는 이 영화를 언급하며 '영화는 음악과 같다'는 말을 영화동아리 면접에서까지 했다.
이 영화 제목은 바로 <피아니스트의 전설>. 교복입던 학창시절 시네마천국이 있었다면, 교복으로부터 벗어난 또다른 학창시절은 이 영화와 함께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민자 선박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죽음을 맞이하는 한 천재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로,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어찌나 절절히 그 음악과 스토리를 느꼈는지 말도 못할 지경이다. 특히 엔니오 모리꼬네의 'Playing love'는 언제 들어도 돌아버릴 정도로 가슴이 아려 - 꿈에서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을 만나는 장면의 배경음악으로도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게 봤던 장면은 사실 피아노니 음악이니 하는 것과는 어떻게보면 별반 상관없는 장면이다. 바로 오프닝 장면.
영화는 나레이션과 함께 이민자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 큰 배를 타고, 각지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넓디 넓은 대서양을 건넌다. 그들 주위의 바다는 온통 안개로 뒤덮여있어들은 어디까지 왔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바다를 오래 건너오긴 했지만, 과연 정확히 언제쯤 뉴욕 항구에 도착할 지는 모른다. 그들은 담요를 둘러싼채, 작은 그릇에 담긴 수프를 겨우 비우며 다시 쌀쌀한 주위의 바닷바람과 안개를 눈으로 맞는다. 너무 지쳐 일어날 힘조차도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배 어디선가에서 그들중 한명이 외친다.
"AMERICA-!!!"
이른바 최초의 발견자, 한 남자가 가리킨 곳 저 너머엔 안개 속 희미한 형체가 보인다. 사람의 형체다. 위로 팔을 높게 뻗고 있다. 그 손끝엔 횃불이 있다. 배에 탄 모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바로 자유의 여신상.
내겐 영화 후반부에 주인공이 선택해 맞이한 운명보다도, 이 장면이 훨씬 슬프게 느껴졌다. 이 영화를 보던 새내기 때 나는 얼마나 많은걸 몰랐나 싶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Playing love'를 들으며, 세월의 서리가 낀 학창시절 첫사랑의 기억만 생각하던 때.
하지만 그로부터 4년 후. 신기루가 사라지고 휑한 들판에 나 혼자 남아있는 지금, 내가 위로받을 전설은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아닌 그 이민자들의 전설이 되었다.
얘기하자면 한참이고 과거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걸 이 지면에 다 쓸 수도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다만 나는 예전부터 너무 지독한 외로움을 많이 겪었고 그래선지 이곳은 내 ‘고향’이 아니라는 생각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끔찍한 저주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내 고향은 누가봐도 서울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곳에서 난 행복할 수 없다니. 난 이 곳을 고향으로 여기지 못하는 내 상태가 너무 싫었고 지금도 싫다. 여기서 행복하고 싶은데, 이 답답한 곳에 적응하며 살다간 평생을 무기력하게 살 것만 같았다.
더 커다란 문제는 그렇다고 새 고향을 찾는 것도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내 고향은 도대체 어디일까. 강력한 후보지는 LA인데, 그건 내 꿈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꿈, 영화감독의 꿈은 이미 바스라졌다. 그래서 나는 LA가 내 고향이 아닐거라 결론지었다. 그럼 영화가 만들어지는 곳이 아니라, 영화의 배경 환상 속의 도시를 고향으로 삼아보자. 그래서 프랑스 파리가 어쩌면 내게 맞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더 큰 오산이었다.
사실 고향찾기는 꿈뿐만 아니라 삶에 가진 모든 기대와 연관이 있었다. 사람 하나만 잘 만나도, 나는 그 사람을 고향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사람인가 싶다가도 바로 실망하고 또 상처받았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하나하나 무너져 내린 경험 때문에 나는 ‘환상’이라는 주제에 집착했다. ‘이미지’, ‘환상’이란 주제를 나는 평생 놓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끊임없이 그것에 배신당하고, 그러면서도 또 사랑하고… 참 못났다.
그래서 나는 그 영화 오프닝에, 이민자 이야기에 그토록 매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날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그들은 나처럼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니까. 새로운 ‘진짜 고향’을 꿈꾸었던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그들은, 결국 성공한 사람들조차도, 새 땅에서도 상처받았던 사람들이니까.
이민자박물관은 뉴저지 유니언파크에서 배를 타고 갔다. 옛날 출입국 건물 그대로라고 해서 되게 낡은 줄 알았다. 상상 속에선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즈 뺨쳤는데, 그것과는 정반대로 깔끔하고 예쁜 건물이었다.
박물관 1층에서는 이민자들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시간대별로 살펴볼 수 있었다. 전시물은 별로 없고 그냥 사진하고 글 자료뿐이었다. 한 가지 새롭게 알게된 것은, '이민자의 역사'에는 전근대 때부터 이러저러한 이유로 도피한 유럽인들 이야기까지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구미를 당긴 것은 2층과 3층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볼거리들로 가득했다. 이렇게 말하니까 초콜릿 공장에 구경온 것 같다만, 실제론 굉장히 씁쓸한 공간이었다. 고등학교 강당 크기의 공간에서 이민자들이 칸막이 사이에 앉아 기다리며 소속절차를 밟았고, 그 후엔 건강검진, 일자리나 범죄기록 등 더 세세한 심사를 받았다. 심사의 한 파트당 하나의 작은 방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방마다 해당 심사 절차와 관련된 소품, 사람들의 회고 음성 등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비좁은 데 한 명씩 가서 서투른 영어를 하며 심사절차를 밟는 이민자들의 모습이 눈앞에 절로 그려졌다. 이 방을 하나하나 통과하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통과되지 못할까봐 얼마나 불안했을까.
온 김에 제대로 보고 가자는 생각에 하도 감정 이입을 하면서 봤더니, 결국 어디 쯤에선가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스스로도 황당해서 눈물을 금방 훔쳤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쉽게 가시진 않았다. 아무리, 아무리 95%가 넘는 사람들이 통과되었다고 해도, 구제적 수치로 보면 매 달 천 여명이 입국불가 통지를 받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민자 출입국 옆 병원 건물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미국에 오려다 병에 걸린 사람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가난 또는 억압만 남은 고향을 떠나 그들은 얼마나 간절히 뉴욕을 바랬고 자유의 여신상을 꿈꾸어왔을까. 그곳 한 곳에 가기 위해서, 그 기나긴 항해를 했던 이민자들의 모습만큼 안타까운게 또 있을까. 아무리 가족과 친구들이 먼저 가 있다고 해도, 새 땅에서 새롭게 살아가는건 희망만큼이나 두려움도 가져다주기 마련이다. 그 불안한 가슴을 이끌고 출입국사무소 앞에 발을 디뎠을 때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엘리스 섬에서 맨해튼 남단은 너무 잘 보인다. 정말 잘 보여서 오히려 짜증이 날 지경이다. 저렇게 가까이 있는데, 뉴욕이 손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데. 누군가는 그 좁은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 속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슬픈 이유는 단순히 인간적인 공감 때문만은 아니다. 공감이라기보단 오히려 소름끼치는 깨달음에 있다. 고향을 떠나 새 고향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단순히 ‘땅’의 문제도 아니고, ‘먹고 살고싶다’의 문제에 그치는게 아니었다. '진짜 내 고향'을 찾아가자는 말은, 내가 태어난 자리의 따뜻한 요람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고향'은 내 경우에 그렇듯이, 오히려 내가 더 원하는 곳, 내게 더 맞는 어떤 자리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을 구박하는 땅을 버리고 풍요롭게 해줄 땅으로 향한 이민자들의 돌아감은 곧 떠남이고, 떠남은 곧 돌아감이다.
모든 인간은 이들 이민자와 같다. 모든 인간들은 이들처럼 무언가를 꿈꾸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들이 꿈꾸었던 뉴욕에 있는 뉴요커마저도, 무언가를 바란다.
많은 이들, 아니 ‘인간’이란 존재 자체는 살아숨쉬는 동안 결코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다. 저 산과, 저 바다 그리고 저 하늘 너머를 지치지 않고 바라본다. 그들의 희망은 멈추지 않고, 그래서 고통도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상상하고, 욕망하며, 노력한다. 환경이 어떤 것이든 간에. 원하는 것이 종교나 신념이든 간에, 물질과 음식이든, 예술이든 혹은 사랑이든 그들은 쌓아간다.
그리고 뉴욕은, 너무 많은 이들에게 ‘환상’, 그들이 ‘원하는 것’의 대명사였다.
이제 나는 알 것 같다. 맨해튼의 빌딩이 어떻게 그렇게 쌓여진 것인지. 어떻게 그렇게, 크게, 높게, 결코 꺾어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하게 쌓일 수 있었는지. 뉴욕 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초록불빛이, 이민자들에게 희망의 등불로 보였던 자유의 여신상과 꼭 같은 색이지 않는가. 그 초록불로 대표되는 ‘원함’ 그 자체가, 그 작은 땅 위의 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무엇이든 능력만 있으면 쟁취할 수 있다’는 그 믿음, 그 믿음의 실천도 한몫을 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결국 모든 인간의 꿈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욕망들이 이루어낸 도시, 그리고 결코 그치지 않고 또 새로운 욕망들을 부추기는 도시. 여기서의 욕망이란 의식주 이상의 것에 대한 과도한 '욕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생존, 그리고 모든 이들이 각자 생각하는 '적어도'의 스펙트럼이 넓은 만큼, 욕망의 종류와 범위도 다양하다. 뉴욕이란 도시를 복잡하게 만드는건 고개 꺾어질 정도로 높은 욕망의 크기가 아니다. 낮은 곳부터 높은 곳까지 빼곡히 들어찬 그 가지각색의 욕망이 쌓인 모습 그 자체다.
맨해튼의 야경을 보면, 그 야경의 아름다움을 부정하기도 전에 유혹되고야 말 것이다.
‘너는 갖고 싶을거야 –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 당신은 얼마든지 원하는걸 손에 넣을 수 있고, 그걸 손에 넣은 당신의 모습은 지금 내 모습처럼 끝내줄거야!’
맨해튼의 거리는, 밤에 발하는 불빛들은 인간의 모든 환상이 ‘도시’의 형상으로 낳아진 것이다. 이 도시의 '멋'은, 이 도시를 짜올린 '욕망'의 멋과도 같다.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 깨끗하건 더럽건, 무수한 욕망이 뒤섞여 그 야경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나는 왜, 이 도시의 불이 결코 꺼지지 않길 바랬는가. 그건 나 역시 나의 꿈이 끝나지 않길 바랬기 때문이다. 저 거리 어딘가를 향해 나만의 열망을 턱없이 가는 주파수로 보내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내 환상, 내가 새로 좇고픈 고향이 나와 멀어지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에. 그래서 무국적자가 되는게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이 기어코 내 것이 될 수 없을지언정, 어떻게든 곁눈질로라도 그것을 바라보고 그 바라봄으로 삶을 지탱할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뉴욕은 빛날 것이고
뉴욕이 빛나는 한, 인간은 꿈꾸길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