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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NY #9. Home

by 정동


뉴욕에 도착하고 나서 이틀째 된 날, 숙소에서 TV를 켰는데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뉴욕이라기보단 뉴욕(JFK)공항이 배경인 영화다. 스필버그 감독의 <터미널>.



빅터 나보스키는 '크라코지아'라는 나라에서 온, 방금 뉴욕 JFK에 도착한 이방인이다. 불행스럽게도 그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오는 동안 고국에선 혁명이 일어났고, 어떤 공항도 그의 국가를 존재하는 국가로 취급해주지 않는다.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공항을 떠나 미국 땅을 밟을 수도 없는 상황. 빅터는 말그대로 '공항' 건물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어찌어찌 먹고 살 방도를 찾을라치면 공항 총책임자인 프랭크가 방해를 한다. 프랭크 입장에선 승진에 걸림돌이 되는 이상한 이방인 따위는 빨리 제거하는게 좋다. 그러나 빅터는 프랭크의 덫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결국엔 운좋게 일자리를 얻는데도 성공한다. 빈 64번 게이트에, 남들이 주운 가구 따위를 가져와 아담한 보금자리를 꾸며놓고 빅터는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던중 그는 청소부, 기내 음식 배달부, 출입국심사직원 등등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중에는 스튜어디스 아멜리아도 있다. 빅터만큼은 아니겠지만 공항이 자기 집만큼이나 익숙할 아멜리아는 빅터와 우연찮게 자주 마주치고, 빅터는 그녀와의 식사를 준비한다. 둘의 관계를 눈치챈 프랭크가 아멜리아에게 빅터의 '무기한 연기 체류자' 자격을 얘기하면서 아멜리아의 빅터에 대한 신뢰는 위험에 처한다. 64번 게이트의 침대와 스탠드불, 책상을 보며 아멜리아는 묻는다. 도대체 왜 공항에서 살게 된거냐고, 뉴욕에는 왜 가려 하는거냐고.

빅터는 이전부터 지니던 비밀스런 깡통을 꺼내든다.

"이건 제 아버지예요."

"설마 아버지가 그 안에 있다고 하는건 아니겠죠?"


빅터는 말한다.

"오래전, 아버지는 신문에서 사진 한 장을 보셨어요. 유명 재즈 연주자들 50명의 단체 사진이었죠. 아버지는 그 신문 사진을 스크랩해두고, 사진 속 연주자들에게 하나하나 편지를 보냈어요. 싸인을 받기 위해서요."

"..."

"얼마 후, 그들로부터 답장이 왔어요. 한 명, 한 명씩... 그렇게 마흔 여덟 그리고 마흔 아홉명까지 싸인이 왔어요. 단 한 명, 베니 골슨 빼고. 아버지는 베니 골슨의 싸인은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죠. 저는 아버지에게 약속했어요. 이 사람의 싸인을 꼭 받겠다고. 베니 골슨이 뉴욕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저는 이곳에 온거예요. 그래서 전 뉴욕에 가야 해요."



이 영화를 부모님 손에 이끌려 극장에서 봤을 땐 고작 초등학교 4학년. 내게 빅터의 사연은 좋게 말하면 산뜻한, 나쁘게 말하면 황당한 충격을 주었다. '고작 캔에 싸인 하나 더 넣기 위해서? 49개도 있는데 50번째 싸인을 위해 왔다가 저 고생을 했다고??'


헌데 그 산뜻함 내지 황당함은 지금 내게 위로이자 감동으로 다가온다. 빅터의 '미션'은 남들이 봤을 때 거창한 사명이 아니다. 그는 참으로 순진하고도 순수했다. 빅터는 그 순수함 하나만으로 머나먼 JFK공항까지 왔고, 그 공항에서 살아남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한다. 뉴욕에 가야하니까. 그러나 그는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고, 이 던지는 질문에 부딪치고 운명사랑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깨달아간다. 그 작은 깡통에 담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삶을 만드는 다른 많은 것들을 만나게 했다는 사실이 내겐 무엇보다도 희망적인 이야기로 느껴진다. 내가 가진 순간의 기억은 다른 경험을 불러내는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내 가슴 가장 깊숙히 박힌 이 영화의 장면은 따로 있다.



빅터는 결국, 뉴욕에 가는 데 성공한다. 그는 렉싱턴가 라마다 호텔에서 50번째 싸인을 받고, 택시에 오른 채 깡통에 그것을 넣고 뚜껑을 덮는다. 마지막으로 깡통에 진심어린 키스를 한 후, 그는 떠난다.


"Where are you going?"



"I'm going.... home."



바로 '집'으로.







이 사진은 유람선에서 찍은 사진이다. 엘리스 섬을 들렀다가 뉴저지 쪽에서 본, 정말 진짜 최후의 '마지막 맨해튼'을 담은 사진은 없다. 또렷이 기억나는건, 햇볕 쨍쨍한 대낮에도 이슬을 머금은 듯 젖어있던 풀밭. 이리저리 자라난 들풀을 가볍게 헤치고 걸어가다, 휙 등돌아 보았던 맨해튼의 우뚝 선 빌딩들의 모습들이다.


헤어질 때가 되니 떠오른다. 처음에 난 이 도시가 뭐하는 곳인가 탐구하려는 마음가짐이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이 도시는 내게 공부하기엔 틀려먹은 도시이다. 거리가 온통 내가 좋아하는 영화로 가득차있었고, 그 결과 나를 짓누르던 일과 명분이 아닌, 편히 누워있을 수 있는 내 고향을 생각게 했으니까.


내 생각에 가장 좋은 여행지는 나를 완전히 다른 신세계 혹은 별천지로 옮기는 - 그래서 나를 옭아매는 모든걸 깡그리 잊게 하는 곳이 아니라, 나의 고향을 생각케 하는 곳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엔 이런 구절이 있다.


‘고향을 떠나야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불행하다.’


이 책을 읽을 때만해도 내가 이 대사의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이젠 아닌 것 같다. 이젠 그 멋지다는 뉴욕에 왔음에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도시나 나라의 이름을 붙여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한 가지 확실한건 있다.


-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빅터의 깡통 이야기는 황당했던만큼이나 나에게 깊은 잔향을 남겼다. 따지고보면 같은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E.T>, <A.I>, 그리고 놀란의 <인터스텔라>와 같은 SF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전부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지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향까지도 전부 빅터가 돌아가고싶어한 'HOME'이다. <월스트리트>도 그렇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티파니에서 아침을>도 그렇다. 모두 무언가를 좇다 자신을 잃게 된 주인공이 도로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따라서 깡통 이야기는 영화의 정수다. 이 복잡한 도시의 핵을 찌르는 스토리다. 그렇기에 난 <터미널>을 잊지 못한다. 언제 어떤 영화를 보든, 언제 어떤 도시를 여행하든 나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질 것이다.


그 집은 나 자신이며, 그 안에선 언제나 영화라는 화롯불이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뉴욕은 그걸 깨닫게 해준 도시다.



이곳은 내게 드보르작의 표현처럼 '신세계'였다. 스크린에서나 볼 수 있는, 실체 없지만 분명 들끓고 있는 용광로였다. 그러나 난 이 도시에서 내 고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도시에서, 무심코 TV를 켰을 때 나온 영화가 <터미널>일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 도시는 수많은 영화의 촬영지이며, 영화속에서 많은 이들은 꿈을 꾸고 포기하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겪는다. '영화'라는 환상의 매체에서 매력적으로 그려져서 이 도시가 멋진것인가?그건 아닌 것 같다. 뉴욕이란 도시 자체가, 그런 '영화'가 탄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도시의 색은 너무 다양해서, 한두편의 그림으론 그려낼 수 없다. 마천루들은 맨들맨들한 청색이면서 진회색이고, 차이나타운과 리틀이탈리는 붉으면서도 검다. 거기에 센트럴파크와 같은 녹색 공원들이 있는 곳. 여름에 느껴지는 이 다채로운 색감이 맨해튼의 색감 그 자체인 것 같다. 그와 관련된 말은 너무 넘쳐나서, 한두편의 시로도 담아낼 수 없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도 부족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속의 음악은, 마치 빼곡한 지층처럼 겹겹이 쌓인채 흐르고 섞여 아무나 노래할 수 있으면서도, 아무나 노래를 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작은 몸에 담긴 혈관을 전부 피면 지구 몇 바퀴를 돈다는데, 꼭 그런 꼴로 이 작은 섬에는 그처럼 많은 것들이 빼곡히 담겨있다. 그걸 펼쳐낸다면 어떨까? MoMA에 걸려있는 잭슨 폴락의 그림을 우주에 그려넣은 듯할까?


이런 곳에서, 뉴요커 아니고서야 누가 자기 고향을 그려볼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보니 내가 간과했던 것이다. 뉴욕을 이리저리 누비는 복잡한 혈관 어딘가에는, 빅터가 들고 온 깡통의 기억이 흐르고 있으리란 사실을 말이다.

빅터가 드디어 공항을 떠날 때, 카메라는 공항을 나서는 빅터의 모습에서 멀어지며 건물 전면부를 보여준다. 거대한 유리창에 비치는 것은 다름 아닌 맨해튼이다. JFK공항을 나와 '뉴욕'을 바라보는 빅터의 모습은, 아버지와의 약속이 담긴 바로 그의 '고향'을 바라보는 모습과도 같지 않을까.






이제 이 도시와 정말 헤어질 시간이다. 8과 2분의 1이란 시간동안 내내 그랬듯, 날씨는 끝내주게 좋다. 마지막 얼굴을 사진으로 찍었으면 좋았겠지만 후회는 없다.


일주일하고도 하루하고도 또 반나절 끝에,


맨해튼을 바라보며 떼는 마지막 발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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