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제발 그만하자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내가 결혼을 하겠다고 얘기했더니 엄마가 물었다.
"그 사람은 싸우면 어떻게 행동하니?"
엄마에게 배우자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싸우면 어떻게 행동하는가'이다. 나는 엄마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아빠는 싸우면 말을 안한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 아빠는 싸우면 정말 입을 다물어버린다. 식사하시라고 부르면 나와서 밥은 먹지만 부르지 않으면 "밥 안먹어?" 물어보지도 않는다.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계속 밥도 안먹고 말도 안할 기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공평하다고 해야 할지 아빠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모두 그런 상태를 참지 못한다. 엄마도 아빠처럼 싸우면 입을 다물어버리는 성향이었다면 나는 아마 숨이 막혀 집을 뛰쳐나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는 누군가와 싸우면 계속 말을 걸고 화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라다 보니 엄마가 사람을 볼 때 '싸우고 화해하는 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그렇다고 아빠가 쉽게 화를 내거나 자주 싸우는 편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아빠는 꽤나 참을성이 있다. 엄마는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인 것에 비해 누군가와 싸워도 금방 풀고 뒤끝이 없다. 아빠는 엄마의 이런 급한 성격을 대체적으로 맞춰주는 편이지만 한 번 뭔가가 틀어져 싸우게 되면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러니까 '싸우는' 데에는 주로 엄마가 원인을 제공하는 편이고 '화해하는' 데에도 엄마가 노력해야 한다. 참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서로 성격이 다른 것을 누가 잘못했다고 탓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성격이 아주 특별나게 좋지도 않은 내가 둘 다 성격이 왜 그러냐고, 성격 고치라고 말할 수도 없다. 거기에다 엄마아빠가 싸울 때 내가 원인이 되는 때도 많은데 그건 내가 뭘 잘못해도 아빠가 내게 꾸중을 하기보다 엄마 탓을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빠는 내게 모진 이야기하는 것을 무척 어려워한다. 대신 편한 엄마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는가 본데 나는 이런 상황들이 견딜 수 없게 힘들다. 차라리 내게 직접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싶지만 아빠는 내게만 한없이 너그럽다.
여행 전에도 이 걱정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설마 짧은 여행 중에 크게 다툴 일이 생길까, 그 좋은데가서 서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지는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그냥 그런 곤란한 상황을 아예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상상하고 싶지 않던 그 일은 결국 벌어졌다.
파리에서 늦잠을 자고 일어나려는데 아래층에서 뭔가 세게 '탁탁'하는 소리가 났다. 뭐지 싶어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아 정말 왜 그래!"하는 엄마 목소리가 들린다. 그때부터 이미 직감했던 것 같다. 내가 상상하던 그 일이 일어나려는구만.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내려가 보니 아빠가 숙소를 나간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엄마는 곤란한 표정으로 아빠가 별 일도 아닌데 화가 났다고, 금방 들어올 테니 걱정말라고 말했다. 들어보니 정말 별 일 아니다. 아빠가 먼저 일어나 냄비에 커피 마실 물을 끓이고 있었고 엄마는 물이 끓고 있는 걸 보고는 전날 부엌 싱크대가 막혀있었으니 그걸 거기에 부으면 되겠다 싶어 냅다 부어버렸다고 (OMG). 아빠는 그걸 거기 왜 다 부어버리냐고 화를 냈다. 엄마는 물은 또 끓이면 되지 그게 뭐 문제냐고 대꾸했다. 아빠는 화가 나서 숙소를 나가버렸다.
누군가 그랬다. 결혼해서 부부가 싸우는 데는 큰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때문이라고. 예순이 넘은 엄마아빠가 이렇게 싸우는 걸 오랜만에 보니 그 말이 다시 생각났다. 이토록 사소한 일로 싸우다니! 그것도 이 아름다운 파리에서!
아빠는 1구짜리 낡은 인덕션에 오랜 시간 물을 끓이면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을 테고 엄마는 막혀있던 싱크대 배수구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물이 끓고 있는 걸 보자 성격이 급한 엄마는 냉큼 그걸 싱크대에 부어버렸을 것이고, 아빠는 그 모습을 '어? 어?'하며 보고 있다 화가 났을 것이다. 그 상황이 너무나 상상이 가고 동시에 일찍 일어나서 엄마아빠의 갈등을 중재하지 못한 나 자신이 한스러웠다. 에어비엔비에서 자보겠다고, 멋진 복층 아파트에서 자보자고 엄마아빠를 꼬셔놓고는 바닥이 삐걱거리는 낡은 집에 데려온 것부터 내 잘못이겠지만.
한참 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나가지 않고 숙소에 있겠다고 했다. 나는 너무 화가 났고 울컥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 말라"고 아빠 등을 떠밀었다. 우리는 일정대로 파리를 돌아다녔지만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다. 아빠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엄마는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나대로 둘을 신경 써야 해서 멋진 식당에 가서도 무엇 하나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이게 무슨 즐거운 가족여행인가 생각하면서 결국 눈물이 났다. 평소 아빠는 싸우고 최소 3,4일은 있어야 화가 다 풀리는데 3,4일 동안 이렇게 계속 돌아다닐 걸 생각하니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 일과를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니 하도 신경을 써서 그런지 배도 고픈 줄 모르고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래층 문이 삐걱 열리더니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또 혼자 산책을 나가나 보다 싶어 한숨이 푹 쉬어졌다.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버티지 싶은 생각에 '아, 그냥 나가지 말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는데 한참이 지나 다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내려가 보니 엄마아빠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엄마는 날 보더니 씩 웃고 있었다.
놀랍게도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지만 아빠는 평소처럼 이야기도 하고 엄마 말에 대꾸도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혹시 내가 한마디 잘못했다가 이 평화가 깨어질까 싶어 일단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우리는 숙소를 나섰고 엄마아빠가 싸우기 전처럼 잘 돌아다녔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빠가 샤워를 하는 동안 엄마에게 살짝 물었다.
"어떻게 화해한거야? 이거 기적 아니야?"
엄마는 웃으면서 말했다. "화해한 건 아니고, 여행 끝나고 다시 싸우기로 했어."
'잉?' 무슨 말인가 했더니 엄마가 아침에 산책을 하며 아빠에게 "우리 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딸내미 불편하게 이러지 말자. 일단 여행 기간 동안에는 평소처럼 잘 다니고 딸내미 마음을 편하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 당신 화난 건 알겠으니깐 그건 한국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를 하든, 화를 내든 하더라도, 이 짧은 여행 기간 동안 우리를 위해서 고생하는 딸내미 스트레스 안받게 해주자"라고 설득했다고. 웃음이 나면서도 결국 '내 덕에' 이 상황이 마무리되었다고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정말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서 이 싸움이 지속될 일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내 존재 자체로 엄마아빠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다행이니까. 우리는 이렇게 평소와는 다르게, 한정된 기간 동안의 '여행'이라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또 '딸내미'와 24시간을 함께 보내는 흔치 않은 이벤트라는 상황 속에서 새롭게 화해하는 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돌아가서 둘이 정말 다시 싸웠는지 아닌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