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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글리 Jan 13. 2019

우리 아빠는 밀덕이다

몰랐던 엄마아빠의 취향을 알게 된다는 건,

나는 컵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고급스러운 빈티지 찻잔을 모으는 종류의 취미는 아니고, 닥치는 대로 내가 좋아하는 모양과 색의 머그컵, 이벤트로 증정되었던 캐릭터 플라스틱 컵, '00상사' 같은 글자가 쓰여있는 답례품 유리잔 등 내 취향의 것들은 닥치는 대로 다 모아 두고 있다.


하지만 내게 컵을 모으는 취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측근인 남편 말에 따르면 나는 '쓰레기 수집가'라고(-_-) 영수증을 모았던 적도 있고, 모양이 특이한 일회용 페트병을 모으기도 했었다. 남편은 나중에 내가 '궁금한 이야기Y' 같은 프로그램에 나올까 봐 걱정이 된단다. '쓰레기를 모으는 할머니' 뭐 이런 컨셉으로...


내게 이런 뭔가를 닥치는 대로 모으는 취미가 있다는 건 엄마아빠도 이미 알고 있다. 어렸을 때는 영화관에서 홍보용으로 배포하는 작은 전단지 같은 영화홍보지를 모으기도 했고(지금도 몰래 조금씩 모으고 있다) 한 영화 잡지에 꽂혀 한동안 방 한 구석에 그 잡지를 탑처럼 쌓아놓기도 했었다. 아빠는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가고는 방이 너무 난잡하다며 그 잡지들을 몰래 조금씩 갖다 버렸다.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취미를 두세 가지씩은 꼭 가지고 살았는데 최근 들어서는 살기 바빠 그동안의 여러 가지 취미들은 조금씩 처분되었고 컵을 모으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한때 열심히 모았던 영화홍보지. 지금도 부모님 집 어딘가에 쌓여있을 듯싶다


엄마아빠와 따로 떨어져 살면서 명절 때 며칠, 시간 날 때 며칠, 이런 식으로 일 년에 며칠 못보고 살다 보니 엄마아빠에게 어떤 취미가 있었는지 완전히 잊고 지내왔다. 함께 살 때에도 엄마의 취미는 TV보기, 아빠의 취미는 신상 전자제품 모으기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최근에 엄마가 음악 다운받는 사이트를 알려달라고 하셔서 엄마가 옛날 노래를 찾으시나 궁금해했었다. 사이트를 알려드렸더니 좋아하셔서 '아 다음엔 블루투스 스피커를 사다 드려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엄마가 여행 가서 들을 거라고 음악 다운로드하는 법을 다시 물어봤다. 설명을 해주다가 "무슨 노래받고 싶은데?" 물어봤더니 아델(Adele) 앨범을 다운받아 갈 거라고 하는 것 아닌가. 조용필, 신승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 입에서 뜻밖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엄마는 아델 목소리와 노래가 너무 좋다고 하면서 다른 가수들 이야기도 하기 시작했는데 모두 엄마가 그동안 좋아했었는지 몰랐던, 혹은 상상도 못했던 가수들이었다. 한동안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와 가수, 여행 가서 듣고 싶은 노래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가 이런 취미가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엄마는 컴퓨터를 잘 쓸 줄 모르는데 진작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음악 듣는 법을 상세하게 알려드릴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톡홀름 ABBA 박물관 앞에서 즐거운 엄마아빠


여행을 하면서 아빠가 '밀덕', 밀리터리덕후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본인이 직접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찍히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아빠가 유독 어디든 대포나 탱크가 보이면 자꾸 그 앞에서 사진을 찍어달라는 것이었다. 운이 좋은 밀덕 아빠는 헬싱키에 가서 소원풀이를 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도착한 날이 바로 핀란드의 전쟁기념일(혹은 군인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헬싱키 중심부의 원로원 광장에서 군인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었는데 규모가 아주 큰 행사라 온갖 대포들과 탱크들, 군인들까지 모두 광장에 나와있었다. 군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군인 중창단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각종 부스에서 핀란드의 군대와 전쟁 역사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그런가 보다'했지만 아빠는 원로원 광장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각종 탱크들과 인사를 한 번씩 하고 사진을 찍은 후 급기야 근처에 있던 무장한 군인들과도 사진을 찍었다. 아빠가 너무 즐거워 보여 내가 직접 군인들에게 "우리 아빠랑 사진 한 장 찍어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밀덕 아빠와 핀란드 군인들의 만남


아빠가 이렇게 군대 관련된 물건들을 좋아하는지 몰랐던 건 아마도 함께 여행을 다닌 적이 많이 없어서였지 싶다. 여행 초반부터 '어디 가고 싶다'라고 좀처럼 말하지 않는 아빠가 파리의 육군박물관에 가고 싶다고 얘기를 꺼냈다. 우리가 전부터 여행을 많이 다녔더라면 아빠의 이런 취향도 진즉에 알고 있었을 텐데. 아빠가 내게 주는 지대한 관심에 비해 나는 아빠의 취향이나 취미에 너무 관심이 없었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대포나 탱크가 보일 때마다 "아빠! 저 앞에 서봐!"하며 내가 더 신나서 사진을 찍어댔다. 온갖 쓰레기를 모으는 딸내미를 30년이나 참고 키워줬는데 나도 아빠의 취미를 존중하고 지원해줄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다음 여행에는 더 멋진 군대가 있는, 더 화려한 군대박물관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아빠 다음 생신 선물로 이런 피규어를 생각하고 있다



항상 자신만의 취미를 가지는 일은 꽤 근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면서도 내 주변 사람들의 취미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어쩌면 우리 남매를 키우느라, 한정된 수입으로 집안을 책임지느라 본인의 취미활동에는 시간과 돈을 쏟을 여력이 없었을 엄마아빠. 이번 여행을 통해 그동안 엄마아빠에게 취향과 취미가 없었던 게 아니라 그보다는 가족들을 챙기고 돌보는 것이 우선이었던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라도 알게 된 엄마아빠의 취향과 취미활동을 적극 지원해주어야지, 혼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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