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가격보지마요 저 돈 많아요
"제발 가격보지마요"
이건 평소에도 내가 많이 하는 말이다. 또한 나 스스로 다짐하는 말이기도 하다. 엄청난 짠순이이자 작은 손인 나. 분명 이건 엄마가 물려주신 훌륭한 유산이라 생각하지만 동시에 이 때문에 여행 후에는 꼭 후회가 남곤 했다. 물론 예산에 맞춰 알뜰하게 여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알뜰이 과해져 궁상이 되는 건 한순간이니까.
여행 전, '혹시나'
여행 전, 비행기표를 사고 숙소를 예약하는 건 내게 고통, 인고의 과정이다. 결정 장애가 있는데다 '혹시나' 더 싼 사이트가 있지는 않을까, 내가 같은 것을 더 비싸게 주고 예약하는 건 아닐까, 가성비가 더 좋은 숙소는 어디일까 고민하다가 꼭 하루 이틀을 넘겨버린다. 안 그래도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워 죽겠는데 고민하다보니 가격이 올라버린다. 그러면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버리는데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비이성적인 상태에서 뭔가를 예약하고 나면 항상 후회가 남는다.
이번에는 상황이 다를 것이라, 엄마아빠와 함께 여행하는 것이니 아주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결론적으로 오산이었다. 오히려 엄마아빠와의 여행을 위해 '더 좋은', '더 멋진' 곳을 한정된 예산 안에서 찾으려다 보니 완전히 랙에 걸려버렸다. 세상에 내 예산에 맞지만 아주 판타스틱한, 그런 숙소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어찌어찌하다 보니 숙소 예약이 끝났다. (이 어찌어찌한 과정과 결과는 다음 글에서 다뤄보려 한다) 가격을 보지 말자고 야심차게 말했고, 굳게 했던 결심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다만 여행 중에는 마음껏 돈을 써야지, 맛있는 것도 먹고 예쁜 것들도 많이 사드려야지 두 번째 결심을 다졌다.
메뉴판은 저만 볼게요.
여행하는 동안 맛있는 걸 마음껏 먹자던 제안은 도통 통하지를 않았다. 엄마는 계속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고 아빠는 자꾸 대충 먹자고 했다. 그래서 결국 배가 고프지 않은 엄마를 위해 음식은 조금만 시켜야 했고 대충 먹자는 아빠를 위해 하루 한 끼는 아시아 음식을(?) 먹어야 했다. 내가 생각했던 럭셔리한 식도락 여행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그래도 전처럼 식당에 들어가 가격표를 보고 식겁해서 뛰쳐나가려는 엄마를 애원하며 붙잡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를 위해 일단 나는 엄마아빠가 메뉴판을 오래 보는 것을 저지했다. 영어 메뉴판이라는 핑계를 대며 내가 직접 메뉴를 보고 설명을 해주었고 계산을 한 후에는 영수증을 절대 받지 않았다. 전에 엄마가 영수증을 보면서 사이다 한 병이 뭐 이렇게 비싸냐며 마음이 상해하는 것을 보고 엄마에게 영수증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무리하는 방법임을 이미 터득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니며 아빠의 까다로운 취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아빠는 모든 음식을 말없이 잘 드시지만 사실 그중에 정말 맛있다고 생각하는 건 몇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아빠가 평소에는 뭐든 잘 먹다가 틈틈이 아시아 음식을 먹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낼 때만 '아 이제 느끼한 것에 지쳤구나' 신호를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정도 아빠가 다 잘 드시길래 '나도 이제 감을 잡았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공교롭게도 바르셀로나 여행 마지막 날이자 유럽여행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우리는 줄 서서 기다리기 일수라는 바르셀로나의 유명 해산물 레스토랑에 갔다. 사실 줄이 있다면 근처 아무 식당에나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식사 시간을 넘긴 때라 줄은 없었고 재료가 소진되지 않은 메뉴 몇 가지를 골라 주문했다. 그런데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어쩐지 아빠의 표정이 묘하게 다르다. 엄청나게 즐거운 표정. 여행 내내 함께 식사를 하며 그런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어쩐지 싸한 느낌을 안고 식사를 마무리하고 나오면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여기 어때? 맛있었어?"
"그래, 여기는(!) 좀 먹을만하더라."
아빠는 정말로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동안 아빠는 한 번도 식사에 만족한 적이 없다는 걸. 난 사실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어쩜 이런 것도 부부가 완전히 반대인지, 엄마는 음식이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맛있다", 혹은 "별로다"를 이야기하곤 한다. 반면 아빠는 한 번도 '별로'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지만 '괜찮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 그 식당이 우리 여행 중 가장 저렴한 식대를 지불한 곳이었다. 조금은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좋은 곳' '럭셔리한 곳' 강박에 엄마아빠의 취향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제발, 뭐라도 골라보세요.
여행을 다니며 이곳저곳에서 기념품도 사고 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선물도 하려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그동안 서로의 생일선물을 챙긴 적이 거의 없었다. 성인이 되고부터는 생일마다 용돈을 보내드리는데 워낙 어릴 때부터 서로 선물을 챙기지 않다 보니 선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엄마아빠 선물을 살뜰히 챙기는 친구들과 그 가족들이 별 것 아닌 선물이나 생뚱맞은 선물에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맞아, 저게 선물하고 받는 즐거움인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물은 그걸 고르는 시간 동안 온전히 그 사람만을 생각하게 되기에 더 의미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엄마아빠가 유럽에 도착하기 전 몇 가지 선물을 준비했다. 엄마아빠가 평소 잘 입을 것 같지 않은 스타일, 그렇지만 여행 다니면서 입기 좋은 편한 옷 몇 벌을 사고 아빠가 좋아하는 와인도 몇 병 샀다. 엄마아빠는 내 선물을 받고 너무 좋아했고 여행하는 동안 자주 그 옷들을 입고 다녔다. 선물을 하고 이렇게 뿌듯한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기분이 좋아 파리나 바르셀로나에 가면 더 좋은 물건들이 많을테니 마음껏 선물해야겠다 결심을 했다. 하지만 웬걸, 엄마아빠는 여행을 시작한 후 좀처럼 뭐가 좋다 싫다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거 어때?"라고 줄기차게 물어봤지만 묵묵부답. 알고보니 도착하자마자 여러 가지 선물을 받은 엄마아빠가 자꾸 내가 뭘 더 사주려고 하니 무엇이 '예쁘다, 좋아보인다'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기로 말을 맞추었던 것이다. 어쩐지 분명 엄마 취향인데도 '별론데?'라고 한다거나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눈은 자꾸 그곳으로 향하는데 아니라고 부정하는 모습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았다. 한 도시마다 딱 하나씩만 마음에 드는 것을 사기로 결정했다. 물론 여기에는 나도 포함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을 한다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나만 주는 것이 아니고, 나만 받는 것도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는 유럽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했던 선물들로 이 여행을 기억하고,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도 "이거, 우리 딸이 스페인에서 사준 건데" 자랑 겸 추억을 읊조리게 될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