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글리 Jan 13. 2019

각자의 역사, 모두의 역사

여행을 통해 엄마아빠의 지나온 삶, 각자의 역사를 나눠본다는 건

우리는 각자 할 얘기가 많은 사람들이다. 세상 누구나 그렇겠지만.

여행하면서 엄마아빠와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았다. 공간을 이동하면서, 뭔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의 역사를 나누었다. 알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 하기도 하고, 전혀 몰랐던 옛이야기와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때로는 기다림이, 때로는 와인 한 잔이 우리를 대화하게 만들었다. 엄마아빠와 전에 이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나, 또 항상 어린 딸로서 내 이야기를 쏟아놓기만 했지 엄마아빠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던 적이 있었나 옛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는 지금 와서 다시 들어보니 전혀 다르게 들리고 엄마아빠 또한 내가 어릴 적에는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이제야 털어놓게 되기도 했다.


대화할 시간이 많았던 우리, 다행히도 주로 즐거운 대화였다


아직 하고픈 일이 많은 엄마

엄마는 참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궁금한 것도 많고. 어쩌면 이렇게 엄마아빠와 유럽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도 엄마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엄마는 아프기 전에는 끊임없이 뭔가를 하는 사람이었다. 여러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고, 도서관에서 열리는 강연을 듣고 공부를 했다. 강연을 함께 듣는 사람들과 학술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옛 이웃이었던 아주머니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도 엄마를 좋아했다. 아프고는 통 사람을 만나지도, 밖에 나가지도 못했지만 여전히 엄마는 TV를 보며, 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 나으면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했고 또 기록했다.

엄마는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지만 동시에 여전히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다. 우리 남매를 낳으면서 직장을 그만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우리가 잘 커줬기 때문에 이미 보상받았다고 생각하고, 몸이 아파 다른 사람들만큼 오래 돌아다닐 수는 없지만 조금씩 어디든 가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여행을 하면서도 엄마는 다음에는 어딜 가보고 싶다, 이번엔 어딜 못가서 아쉽다는 말을 자주 했다. 엄마는 아팠을 때 "이럴 줄 알았으면 전에 더 많이 다녀볼걸" 후회를 했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당장 모든 것을 과제처럼 다 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또 오면 되지"라고 말했다. 아직 할 일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너무 많은 엄마에게 항상 동지가 되어주겠다 스스로 다짐했다.



가장으로서, 또 동료로서의 아빠

여행 중에 밤마다 와인을 마시며 아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와의 대화는 종종 아빠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이 시대 가장들의 이야기, 변해가는 세상에서 힘들게 자신의 속도를 내고 있는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하루는 '요즘 사람들'이란 주제로 아주 평범한, 또 꽤나 격렬한 대화가 이어졌다. '요즘 사람'을 대표하는 나와 '옛날 사람'을 대표하는 아빠 사이의 있음 직한, 그런 흔한 대화였다. 아빠는 긴장감 없고 끈기 없는 요즘 사람들과 일하며 힘들었던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왜 있던 끈기도 없어지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 아빠는 말했다.

"한순간이라도 느슨해지면 사람이 다치고 한 가정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부터는 네가 말하듯 그렇게 '유연하게', '융통성 있게' 살 수가 없게 되더라"

아빠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고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외양선에서 기관장으로 일했던 아빠는 짐작은 했지만 내 상상보다 더 무서운 상사였던 것 같다. 아빠는 작은 실수로, 찰나의 방심으로 다치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동료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셨다. 아빠의 무뚝뚝함과 과묵함 속에 많은 고민과 슬픔이 있었다. 아빠는 아빠였기에 동료들과 그들의 가족을 걱정했고, 또 상사였기에 때로는 냉정해야 했으리라.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건 처음이었다. 아마도 일상에서 벗어난 타지의 낯선 공간,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와인 한 병이 있었기에 이런 대화를 하게 된 것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나

내가 대학을 들어갔던 해에 엄마는 내게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평소 표현을 잘하지 않는 엄마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어딘가 간지럽기도 하고 조금 놀랍기도 했다. 엄마는 사교육 없이 혼자 공부하면서 고3이라고 유별나게 굴지도 않고 문제없이 대학도 들어간 딸내미가 대견하고 미안하다고,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았었다. 엄마는 요즘에도 그 이야기를 하면서 고맙다고, 또 그 이후로도 자기 앞길 알아서 잘 찾아가는 딸이라 걱정이 없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예전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그저 간지럽고 부끄러웠다. 그런데 서른이 넘은 이제서야 엄마가 얼마나 나를 독립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해줬는지, 장녀라는 부담감 전혀 없이 키워줬는지 오히려 고맙고 존경스럽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집에 아빠가 없었던 상황에서 혼자 두 아이를 키워내야 했던 엄마의 단단함과, 타지 바다에서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 아빠의 책임감이, 이런 엄마아빠의 시간과 역사가 없었다면 과연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우리 각자의 시간과 고민, 그 모든 역사들이 모여 우리 가족을 지탱해주는 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하게 되었다.


이전 11화 찰칵, 찰칵, 또 찰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