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서로에게 감동을 주고 또 감동을 받는 것 아닐까
누구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이 있다.
기억력이 유독 좋지 못한 내게도 그런 강렬한 기억들, 가슴에 진하게 남아있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는 아빠가 일하는 배에 처음 올라보았을 때이다. 아주 어렸을 때로 기억하는데 바다 위에 떠있는 엄청나게 큰 외양선 위에 처음 올라서 아래를 바라보았을 때의 그 아찔함,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서 탁 트이는 공기, 그리고 그 아래 아빠가 생활하고 있던 작지만 깔끔했던 선실. 어릴 때는 그저 모든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이처럼 느껴졌지만 지금 내게는 어쩐지 찡한, 감동적인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또 다른 기억 하나는 엄마아빠가 어릴 적 데려갔던 제주도에서의 추억들이다. 가족여행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혹은 많이 하지 않아서 그런지 제주도에서의 추억들이 내 머리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특히 여미지 식물원에서 느꼈던 식물원 특유의 축축함과 푸르름, 평소 볼 수 없는 이색적인 열대식물들, 그 앞에서 연신 내 사진을 찍어대던 엄마아빠의 모습, 이 모든 것들이 조각조각, 행복했던 추억으로 떠올랐다.
이렇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잊지 못할 순간순간의 조각들은 모두 엄마아빠가 함께 만들어준 것이었고 그 속에 엄마아빠가 함께 녹아있다. 추억을 더듬어 글을 쓰다 보니 일상의 평범함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오래 남는 아주 강렬한 기억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엄마아빠에게는 어떤 추억과 기억들이 있을까.
아빠에게는 몇 가지 주요 레퍼토리가 있는데, 특히 우리 남편은 이 레퍼토리들을 대략 다섯 번 이상은 들었을 것이다. 아빠가 기억하는 인생의 잊지 못할, 행복한 순간들, 때로는 아찔한 순간들은 대부분 나와 연관된 것들이다. 어릴 때 내가 아파트 복도를 뛰어다니며 집집마다 대문 앞에 똥을 싸고는 도망쳤던 약간은 더러웠던 추억, 아스팔트 내리막길을 미친듯이 뛰어내려가는 나를 따라 함께 뛰었던 아찔한 추억 같은 것들. 아빠는 만날 때마다 이 이야기를 몇 번씩 하는데 어찌나 즐겁게 회상을 하는지 보는 나도 듣기에 지겹지 않고 재미있을 정도다.
유럽여행을 하면서 엄마아빠에게 더 즐거운, 행복한 추억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더 이상 동네방네 귀여운 엉덩이를 자랑하지도, 기운차게 뛰어다니지도 않는 다 커버린 딸이지만 새롭고 아름다운 공간인 유럽에서 우리만의 새로운 추억을 쌓는 것이 앞으로 남은 세월동안 우리에게 더 많은 추억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안겨주리라 생각했다.
"우리 딸 덕분에 이런 구경도 하고. 엄마는 정말 행복하다"
에펠탑 아래서 엄마가 말했다. 비록 미리 입장표를 예매하지 않아 한참을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 나름 절망적인 상황이었음에도 엄마는 그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만으로 정말 행복해하고 있었다. 엄마의 그 말에 눈물이 찔끔 나고 말았다. 나는 나름 이 여행을 위해 애쓰고 있었고 그럼에도 스스로 아주 만족스런 여행이 아니었기에 아빠엄마에게 내심 미안함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내 덕에 이렇게 행복하다니. 나는 엄마의 눈에서 진심으로 반짝거리는 행복을 보았다. TV 여행 프로그램을 많이 본 덕에 간접적으로는 안가본 곳이 없는 엄마. 아프기 전에는 여행도 많이 다녔었는데 아프고는 한 번도 제대로 여행을 간 적이 없었다. 그동안 TV에서 보았던 곳들을 얼마나 가보고 싶었을지, 누구나 다 간다는 에펠탑 한 번을 못가보고 얼마나 서글펐을지, 엄마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에펠탑 아래에서 느꼈을 감동을 이미 에펠탑 앞에 몇 번이나 가봤던 나 또한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아빠엄마가 표현에 그리 후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엄마의 초롱초롱한 눈에서, 아빠의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 끝에서 '아, 지금 다들 만족스럽구만'하고 느꼈다. 언젠가부터는 엄마아빠의 만족도에서 여행의 순탄함, 혹은 안정감을 느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한 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며 지치는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지나고보니 여행지 그 자체보다 엄마아빠의 얼굴을 보며 여행하는 순간순간들이 내게 주는 의미가 더 크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엄마아빠는 내가 없었다면 이런 여행을 할 수 없을 것이라 말했고, 나 또한 엄마아빠와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그 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프랑스도, 스웨덴도, 핀란드도 혼자 다녀보았지만 엄마아빠와 함께 간 그 곳은 아주 새로운 시각과 추억으로 바뀌었다.
엄마아빠가 유럽여행을 하며 때때로 자그마한 감동을 느꼈다면, 나는 그런 엄마아빠를 보면서 감동했다. 지금 내 기억 속에 좋았던 여행지들, 멋졌던 풍경들이 기억에 남기보다는 행복해했던 엄마아빠의 얼굴, 신나 했던 손짓 발짓이 더 떠오르니 말이다. '효도여행'이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다. 정말 여행을 통해 처음으로 제대로 효도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 엄마아빠가 나를 키우며, 나를 지켜보며 느꼈을 지난날의 행복을 아주 조금이라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