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페롤(Aperol) 혹은 레드와인
엄마에게,
가을이 선뜻 느껴지는 요즘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인 가을.
사실 여름이 너무 빨리 끝난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있어. 그래도 여름이 짧아진 만큼 가을이 조금 더 길어진다면 반가운 일이야. 새로운 시작이란 느낌을 주는 달이 있다면 보통 1월을 떠올리겠지만, 9월도 뭔가 새로운 다짐을 하고 새해 목표도 한번 점검하고 다시 시작하는 동력을 주는 힘을 내게 하는 달이라고 생각해.
여름 해가 유난히 긴 유럽에서는 밤 10시가 되어야 짙은 밤이 시작돼. 해가 떠 있는 만큼 하루가 더 긴 느낌이라, 막상 여름이 끝날 때쯤에는 아쉬움이 그렇게 크진 않아. 다만 아, 이제 추워질 파리를 각오해야겠다,라고 으스한 날씨를 기억해내곤 했어. 그런데 가을인 듯 하지만 여름 같은 날씨, 여름의 햇살 속 가을의 공기, 가을색을 입은 공원과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여름휴가 같은 피크닉 인파를 보면 이토록 풍성한 계절의 팔레트를 보여주는 파리에 감탄이 나와. 파리는 어쩜 이러지?
파리의 여름을 말하자면, 음… 식전주로 마시는 아페롤과 같은 느낌이야. 싱그럽고 상큼하고 젊고 시원한… 저녁노을이 반사되어 주황빛으로 물드는 오래된 건물들, 센강변을 따라 켜지는 금빛 조명이 바로 아페롤과 같은 파리의 여름 팔레트 색이야. 음료수 같다 생각하지만 아페롤도 막상 꽤 농도가 짙은 알코올이라 마시면 조금 알딸딸함이 느껴지거든. 그토록 눈부신 파리의 여름, 그 황홀한 여름밤에 취하기에 적당한 아페롤, 적당히 취하고 싶은 파리의 계절. 청춘으로 돌아간 듯한 자유로움과 믿기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는 파리의 정점이 바로 여름이라고 생각해. 마치 인생의 20대를 지나는 것 같아서.
그러다 여름 해가 서서히 짧아지고 피부에 닿는 공기 속에서 가을 향이 전해지면 파리는 보르도의 레드 와인과 같은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 같아. 투명한 듯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조금은 성숙한 듯하고 조금은 냉정해진 듯한, 진지하면서도 또 예술적인 모습으로 파리의 팔레트가 가을색으로 채워져. 점점 두꺼워지는 사람들의 옷차림만큼 깊이와 향을 더해가는 와인의 모습을 띄는 파리의 가을. 금세 겨울로 바뀌어버릴까 봐 조심스러우면서도 여름의 티를 벗지 못한 관광객들, 그 사이로 배어 나오는 파리지앵의 노련한 계절 감각,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파리의 오페라. 나는 화려한 여름보단 세련된 가을의 파리와 엄마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좋은 와인을 찾고 골라서 선물하는 마음으로 파리의 가을에 엄마를 초대하고 싶다.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엄마니까, 파리의 가을을 닮은 와인 대신 엄마가 좋아하던 커피를 사 줄게. 엄마와 지나가는 청춘과 같은 여름의 추억을 나누고, 찬란한 깊이로 매력을 발산하는 가을을 기대하는 마음을 고백할 거야. 하고 싶은걸 다 하며 살았던 20대를 허락해줘서 고맙다고, 순간순간의 선택이 더해져서 삶의 깊이와 결을 만들어 나간 30대였다고 자랑하고, 지금으로썬 여전히 불안하지만 지혜가 쌓이고 나만의 팔레트가 채워질 미래가 기대된다고 말할 거야.
엄마.
흉악한 일들이 매일같이 보도되는 세상이라도, 여전히 아름다운 것들이 많아. 아름다움을 두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파리에서도, 또 어디에서든 아름다운 색, 색의 변화, 각각의 색이 지니는 깊이와 의미를 감상하고 기억하는 딸이 되어 살아갈게. 그래서 나만의 팔레트를 가지고 사는 삶을 살아나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