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과 아름다움의 공존인 공간으로서의 유럽
엄마에게
우리가 유럽여행을 가면 어떻게 이렇게나 오래된 건물이나 도로가 아직도 잘 유지될까, 놀랍고 경이롭기도 하고 동시에 그렇게 역사를 간직하려는 노력을 쌓아온 시간들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끼잖아. 왜 우리나라는 모든 걸 허물어버려야 새로운 걸 시작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건지 괜스레 비교되면서. 나라마다 보존과 개발에 대한 해석이 다른 것도 참 신기해. 한 나라가 지나와야 했던 역사의 길에 따라, 그리고 지구의 어느 쪽에 위치해 있는가에 따라 그곳의 경제 수준이 정해지고 국민들의 인식이 생겨난다니.
그런데 사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종종 그 이면에 불편함이란 현실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벨기에에서 다닌 학교는 1400년대에 지어진 만큼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만, 현대적 건물에서 당연하게 제공하는 편의성이나 편리함은 전혀 없었어. 책상과 의자가 붙어있는 딱딱한 강의실 의자는 노트북을 올려놓기엔 너무 좁았고, 2시간 강의를 듣고 난 후엔 허리가 아플 정도였어. 도서관이 너무 좁고 작아 시험기간이면 새벽부터 줄 서서 입장할 정도로 자리 전쟁이었고, 어째서 도서관의 화장실 냄새는 아무리 환기를 시켜도 빠지지 않는 건지. 세월과 함께 화장실의 냄새까지 보존된 듯했지. 그렇지만 불편함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온 유럽의 친구들은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어. 왠지 나처럼 도시에서 온, 빠르고 편안함이 최고의 가치인 듯 돌아가는 서울에서 온 나만 불평을 늘어놓는 것 같더라.
처음 파리에 와서 집을 구할 때, 나는 엘리베이터의 유무를 집 구하는 조건에 포함시킨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어.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이 그렇게나 많은 줄 몰랐지! 다행히 내가 계약하게 된 스튜디오엔 2명이 타면 꽉 찰 정도로 작았지만 엘리베이터가 있긴 있었어. 그리고 또 열쇠를 써야 한다는 거. 옛날 영화에서나 보던 묵직한 오래된 열쇠 있지. 아니 왜 도어록을 안 쓰냐고, 이미 상용화된 기술이 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고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이 사람들이 대체 이해가 안 되더라.
그러던 하루, 친구가 우리 집에서 잠시 지낼 때가 있었어. 나는 회사를 다녀야 했으므로 낮 동안 친구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열쇠를 맡겼거든. 어느 날 친구가 외출했다 돌아왔는데 집에 와보니 가방에 달려있어야 할 열쇠가 없었던 거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봤는데도 열쇠를 못 찾았어. 돈을 내고서라도 열쇠를 복사해야 하는데 집주인은 바캉스를 떠나 파리에 없고, 집에 들어가려면 문짝을 떼어야 되는데 그러면 수백 유로가 들 수도 있다는 말에 친구도 패닉 나도 패닉이었어. 정말 왜 도어록을 안 쓰냐고!!
어찌어찌해서 중국인 열쇠공을 불러 열쇠를 찍어내고 비용도 크게 들지 않은 채 집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엄마, 참 신기하지. 편하기도 하고 오히려 열쇠 잃어버릴 일이 없어 안전하다고 생각되던 도어록보다, 열쇠 복사하는 것부터가 이렇게나 어렵고 비싸게 만들어놓은 사회 구조라면 그냥 열쇠로 문을 여는 기존의 방식이 더 안전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 절대적이어야 할 안전이란 개념이 상대적이 되어버리더라고. 우리가 유럽에서 지내면서 불편하다고 느끼는 감정이 사실 절대적인 느낌이 아니고, 우리가 서울에서 겪으며 편리하다고 믿었던 감정도 알고 보면 상대적인 것처럼.
엄마.
한창의 여름을 보내고 가을로 접어든 요즘은 ‘여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돼.
파리에 산다는 유한한 환경 속에 더 즐겨야 하고 더 누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진 않아. 그런데 과연 여유란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인지, 혹은 바쁜 가운데서나 찾아지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어. 관광이라는 것도 여유가 될 수 있을까? 짬을 내어 아침부터 밤까지 돌아다니는 일정들이 여유라는 표현으로 설명되는 게 맞을까?
우리가 여유를 갖고 싶어 한다는 건 어쩌면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을 부러워한다는 뜻 같아. 그렇다면 그들의 어떤 모습을 보고 ‘여유’라고 해석한 것일까. 그럼 나는 ‘여유’ 자체를 갖고 싶어 한다는 걸까 아니면 ‘여유로워 보이는 나의 모습’을 남들이 부러워해주는 것을 바라는 것일까?
파리라는 곳이 나를 더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일부 더 남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 같아. 나는 파리에서의 삶이 한국에서 만큼이나 바쁜데, 왠지 유럽이니까, 파리니까, 서울보다는 조금 더 여유로워 보여야 할 것 같고, 그런 의식으로 ‘파리 관광’에 집착하게 되었어. 그래도 파리에서 살 수 있는 시간들은 절대적이고, 돌아보면 이 절대적으로 유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보낸 하루하루가 후회로 남지 않으려면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여유를 찾는 노력을 해야겠지.
엄마에겐 어떤 여유를 찾고 즐겼던 추억과 기억이 있을까, 궁금하다. 우리보다 더 치열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엄마 세대는 여유를 또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지. 타인의 여유와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자신의 여유를 찾아가는 우리 세대와는 달리, 어쩌면 여유 자체가 허락되지 않거나 금기시되었던 사회를 살았을 수도 있고. 난 엄마에게도 여유가 있는 삶이 있었기를 바라. 여유가 게으름을 상징하던 시대일지어도, 휴식과 충전이 되었던 시간들이 있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