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간서치와 전기수의 이야기-21-

by 간서치 N 전기수

에리히 프롬의 이 책에 담긴 주옥 같은 말들을 옮겨 적어 보았다.


인간은 자연의 변덕이다.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생명체이다. 인간은 자연에 살면서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과거, 자신의 미래를 자각한다.


자연에서 거의 뿌리가 뽑힌 존재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문제를 떠안는다.


광기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의 상태이다.


사랑이란 그 사랑에 관여한 사람들의 온전함과 현실을 둘 다 보존하는 유일한 형태의 관계.


진정한 사랑에서는 타인과의 연관성과 자신의 온전함이 보존된다.


진정한 윤리는 특정 국가나 특정 연령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각자가 살아가는 서로 다르고 특수한 상황이 있고, 그로 인해 동일한 윤리 문제의 다양한 측면들이 생겨난다.


비합리적 권위는 항상 공포와 감정적 복종에 바탕을 둔 압력 행사를 동반한다.


합리적 권위는 능력과 지식에 근거하며 비판을 허용하고, 그 본질상 감소하는 경향이 있으며, 복종과 마조히즘 같은 감정적 요인보다는 직업 능력처럼 한 인간의 능력에 대한 현실적 인정에 바탕을 둔 모든 종류의 권위를 말한다.


공개적 권위는 대결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한다.


익명의 권위는 시장이요, 여론이며, 건강한 인간 이성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고 싶다는 소망, 무리에서 벗어나다가는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사실 모든 문화는 질병에 대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갖는다.


세기의 질병, 즉 인생의 무의미함은 인간이 사물로 변한 데 그 원인이 있다.


인간은 자신을, 자신의 확신,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자기 고유의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내 집이 내 성이다.


자신은 인간의 본질이나 본성이 어느 정도는-동물의 실존과 달리- 인간의 실존에 내재하는 모순에 처해 있다고 본다.


인간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분열과 불균형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근절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인간의 본성은 원칙일 뿐 아니라 능력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이성과 사랑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만큼 자신의 본질에 도달한다.


자유에 대한 질문과 수단이나 목적에 대한 질문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유는 사실이라기 보다 가능성이다. 인간의 진짜 인격의 실현인 것이다. 자유는 장애와 조건과 투쟁하여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자유는 -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말했듯 - 인간 존엄성의 발견, 혹은 인간 본질 그 자체이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스의 이 오래된 명언은 자유의 뿔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친다. 예부터 자기 인식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 성숙에 이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잠재적으로 우리인 그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각에 이르는 만큼만, 현실을 인식하는 만큼만 자유로워진다.


자신을 소유자로 소외시키는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을일 뿐 인간 인격으로서의 자신이 되기를 중단하였다.


쾌락주의자의 슬픔은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지만 결국에는 별것 아닌 사람이 되고 마는 '세인'의 슬픔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진짜에 대한 질문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모든 형이상학적 체계는 세상을 바라보는 특정한 관점, 즉 세계관을 제시한다.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초월성은 더 높은 힘의 실존에 대한 암시이다.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자신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 세기의 중심 문제는 인간의 상호관계이다.


사교성은 인간의 본질적 특징이다.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나와 너의 실존과 관련이 있다.


인간은 본성상 타인을 위한 존재이다.


모든 이론이 - 표현은 다르지만 - 같은 사상을 담고 있다. 인간은 본질상 초월의 욕망을 품은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 자신이 되려는 욕망을 품은 존재이다.


현대인들은 인간과 인간의 실질적 소통 가능성에 진지하게 의문을 품는다.


소통의 문제는 사회적 혹은 역사적 문제만이 아니다. 더 깊은 저변에는 실존적 문제가 깔려 있다.


실제의 공동체를 이루려면 이 모든 장애와 불투명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자아를 넘어 타인의 자아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나와 너와 우리를 껴안는 책임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인식이지만, 또 인식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적극적 자유는 통합된 전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다.


활동은 어떤 것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활동이란 감정의 영역은 물론이고 지적, 감각적, 의지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지는 인간의 창의적 활동을 말한다.


자발적 활동은 자아의 온전함을 희생하지 않고도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자아의 자발적 실현을 통해 인간은 새롭게 세상 - 인간, 자연, 자기 자신 - 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발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사랑이다.


자발성은 다른 요인은 노동이다.


인간이 창조의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노동


인간이건 생명 없는 사물이건 창조적 활동을 통해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만이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자발적 활동이 낳은 속성들만이 우리의 자아에 힘을 주고, 자아가 온전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닦아준다.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민족 - 활동의 순간 체험하는 것 - 을 읽고서 잡았다고 믿는 순간 실망을 안겨주는 환영과 성공이라는 이름의 가짜 행복의 뒤를 쫓아다닌다.


자발적 활동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이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 개인은 더 이상 고립된 원자가 아니다.


개인이 자신과 세상 속에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의혹을 극복하고 자발적 체험의 행위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면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면, 개체로서 힘을 얻을 뿐 아니라 안전도 확보된다. 여기에서의 안전은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가 최초의 애착과 구분되듯 개인주의 전 단계의 특징인 안전과 구분된다. 이 새로운 안전은 외부에 존재하는 더 높은 힘의 보호에서 나오지 않는다. 삶의 비극적 측면이 완전히 제거된 안전도 아니다. 새로운 안전은 역동적이다. 타인의 보호가 아니라 자신의 자발적 활동에 근거를 둔다.


인간은 자기 삶의 중심이자 목적이며, 개성의 실현은 이른바 더 값지다고 주장하는 그 어떤 목적에도 결코 종속될 수 없는 목적이다.


죽음과 삶의 비극적 측면의 자각은 활식하건 그렇지 않건 인간의 기본 특성 중 하나이다.


우리 시대는 죽음을 아주 간단하게 부인함으로써 삶의 기본적 측면을 부정한다.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자각을 삶의 가장 강한 동력으로, 인간적 연대의 토대로, 기쁨과 열정에 강도와 깊이를 선사하는 경험으로 만드는 대신 이런 경험을 억압하라고 강요한다.


우리는 부인하려 애쓰지만 죽음의 공포는 생생하게 살아남는다.


처음부터 우리의 교육은ㅇ 아이의 독자적 사고를 막고 아이의 머리에 완성된 생각을 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학생들의 시간과 에너지가 점점 더 많은 사실을 배우는 데 쓰이기 때문에 정작 사고를 할 시간은 거의 남지 않는다.


독자적 사고의 용기를 앗아가는 또 다른 방법은 모든 진리의 상대화


진리는 힘없는 사람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이다.


인간 내면의 강인함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아는지의 여부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온전하게 완성할수록, 다시 말해 '자신을 잘 꿰뚫어볼수록' 더 강해진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인간의 힘과 행복을 목표로 하는 기본 계명이다.


냉소주의와 순진함의 결합은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 결과 현대인은 자신의 사고를 하며 결단을 내릴 용기를 잃게 된다.


'독창성'의 결핍은 감정과 사고뿐 아니라 소망에도 해당된다.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내기는 특별히 힘겹다. 현대인들은 - 무언가 있기는 하다면 - 너무 바라는 것이 많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모조리 다 가질 수는 없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다.


현대인은 자신의 추구하는 것이 정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를 고민할 시간을 내지 않는다.


현대인은 모두가 '자신인' 목표라고 우기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엄청난 모험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위험과 책임을 감수하고 자기 자신의 목표를 정하는 데에는 심각한 공포를 느낀다. 혼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증거라는 착가에 빠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우리의 소망이 - 우리의 생각과 느낌 역시 - 어느 정도까지 진짜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것인지를 깨닫기가 이렇게나 힘든 것은 권위와 자유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의 역사를 거치면서 교회의 권위는 국가의 권위에 자리를 내주었고 국가의 권위는 양심의 권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는 양심의 권위가 건강한 인간 이성과 여론이라는 익명의 권위로 대체되었고, 결과적으로 순응에 도달하였다. 공개적 형태의 낡은 권위를 벗어던진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종류의 권위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개닫지 못한다. 우리는 순응주의자가 되었지만 스스로가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이런 착각은 개인이 자신의 불안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도와주기는 하지만, 줄 수 있는 도움은 거기까지다. 근본적으로 자아가 너무 허약해졌기 때문에 인간은 무력한 느낌,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린다. 더 이상 진정한 과계를 맺지 못하고 모든 것이 도구화된 세상에 살다보니 인간도 자기 손으로 만든 기계의 일부처럼 되어버렸다. 인간은 타인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며, 그러느라 자유로운 인간의 진짜 확신의 근거가 될 자아를 상실했다.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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