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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마 Aug 23. 2022

민선이에게3

강화길 <화이트 호스>



민선아, 평화롭고 두근거리는 밤에 편지를 쓴다. 너는 좋은 밤 보내고 있니? 퇴근 후 누리는 자유이기 때문에 이 시간이 좋은 것도 있지만, 나는 어딘가에 메여 일을 하기 전에도 낮보다 밤을 훨씬 좋아했어. 어릴 때부터 그랬던 걸로 기억해. 누군가 물어보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밤을 좋아한다고 답했을 거야. 학생 때는 시험 기간이면 저녁 일찍 잠들어서 늦은 밤, 혹은 새벽에 깨어 아침까지 공부하곤 했어. 세상이 온통 조용한데 내가 그 아름다운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아서 고요하고 서늘한 밤이 참 좋았어. 왠지 들뜨는 이런 밤엔 공포영화를 한 편 보다 잠들고 싶어. 이 말을 들으면 너는 또 질색하며 그런 걸 왜 보냐고 하겠지? 너와 나의 영화 취향은 너무나 반대여서 함께 주말을 보내기가 난감할 때가 많았어. 내가 미드소마 같은 영화를 보자고 할 때 너는 어벤저스를 보러 극장을 찾는 타입이었으니까.


여기서 반전. 나의 영화 취향은 사실 민선이 네가 만들어 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냐. 내가 극장에서 본 첫 영화는 <디 아더스>야. 초등학교 3학년 때라 12세가 아니었는데도 보호자인 너의 손을 잡고 당당히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어. 나는 그 영화가 너무 좋아서 나중에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려 혼자 집에 있을 때 다시 보기도 했어. 뭐에 그렇게 매혹된 건지 지금의 내 나이가 되어서야 알 것 같아. 그리고 그 영화에 빠졌던 이유가 평화로운 밤 시간을 굳이 공포물과 함께 보내려고 하는 고약한 취향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대학교 졸업반 무렵부터 열렬히 좋아하게 된 작가가 있어. 열렬히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이미 공포스럽지만(어느 영화가 생각난다) 아무튼 강화길이라는 작가의 소설을 무척 좋아하게 됐어. 나와 비슷한 세대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를 좋아하는 일의 문제점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인터넷 서점에서 작가의 신간 알림 소식을 활성화해놓고 이미 읽은 책을 읽고 또 읽는 것. 신간을 손에 넣게 되더라도 무척 아끼며, 아까워하며 읽는 거야. 그렇게 아껴 읽은 책 중 <화이트 호스>라는 소설집을 오늘 소개하려고 해.


강화길 작가의 소설을 처음 접한 건 <2017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였어. ‘호수’라는 단편을 읽었지. 그 소설을 처음 읽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 나. 나는 그때 현대소설 수업에 제출하는 한편 신춘문예에 응모할 소설 구상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어. 글을 쓰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글의 행방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지곤 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거야, 낙방할 거야, 기억되지 않을 거야,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 이런 생각들이 상상력이 뻗어나가는 걸 방해하고 문장에 힘이 실리는 걸 가로막았어. 바로 그 시기에 너와 교통사고가 났어. 같이 차를 타고 어딘가에 가다가 말야. 병실에 누워서 다운로드 받은 ebook들을 훑어보다 강화길 작가의 작품을 만났어. 그야말로 교통사고 같았고, 늦은 밤 조용한 병실에서 소설을 읽으며 내가 보고 싶고 쓰고 싶은 작품, 내가 원하는 콘텐츠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어. 나는 무서운 소설을 쓰고 싶었어. 귀신이 나오거나 피가 낭자하지 않아도 너무 무서워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소설. ‘호수’는 친구의 죽음 이후 단서를 찾기 위해 친구의 남자친구와 길을 걷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야. 정확히 말하면, 그 여자가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느끼는 공포감에 대한 이야기야.


강화길 작가의 소설은 이런 식이야. 아름다운 문장과 배경 사이를 헤집다가 이게 너무너무 무서운 얘기라는 걸 깨달아 버리게 돼. 강화길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화이트 호스>라는 소설집은 ‘호수’ 속 세계가 확장된 듯한 소설들로 알차게 이루어져 있어. 나는 현대 한국 작가들의 소설집을 보면 아이돌들의 잘 만들어진 앨범 트랙 같다는 생각이 들어. <화이트 호스>는 총 7개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어. 그 중 표제작인 ‘화이트 호스’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 제목이기도 해. ‘음복’과 ‘가원’이라는 소설로 시작하며 가족 사이의 스릴러를 느끼게 하다가 스릴러는 ‘손’에 이르러 마을 단위로 커지고, ‘서우’를 기점으로 여성이 느끼는 공포 일반을 이야기해. ‘오물자의 출현’, ‘화이트 호스’, ‘카밀라’에 이르러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여성들이 등장해.


이 소설집이 무서웠던 건 나와 비슷해 보이는 여성들이 점차 공포의 내력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었어. 여성들이 공포를 느끼는 사람인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거지. 나에게 그 과정은 꽤나 설득력이 있는데, ‘여성의 공포’라는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전혀 알 수 없는 서사라는 사실도 공포스러웠어. 어쩌면 나는 이해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될까봐 두려운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력이라는 말이 참 근사하면서도 슬픈 것 같아. 집의 내력이라고 하면 대대로 내려오는 멋진 집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생활의 냄새가 베어버린 곰팡이 슨 집을 떠올릴 수도 있잖아. 그런 의미에서 공포는 후자에 가까운 내력이라고 생각해. 점점 이해 불가능한 영역의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 냄새와 습이 생기듯 불쾌한 기운을 퍼뜨리게 되는 것, 어느 누가 이런 존재가 되고 싶겠어.


그런데 나는 오랫동안 내력 있는 여자들을 지켜보는 데 천착했던 것 같아. 어렸을 때부터 무서워하는 게 있으면 거기에 집착했어. 두려움의 대상을 똑바로 보고 파헤쳐야 빠져나올 수 있다는 듯이. 이상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엔 공포였다가 점차 매혹으로, 호기심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 <화이트 호스> 속 여성들도 그런 모습이었어. 이상하고 불쾌한 모습. 이를테면 이런 모습이지.


 사람이구나. 다른 식구들의 신경을 긁어대는 인간. 미움받을 소리를 잔뜩 늘어놓고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못돼 처먹은 거라고 말하는 사람. 같은 공간에서 숨쉬는 것조차 부담스럽고 싫은 사람. 그래, 바로 그녀였다. -<음복>


어때? 혹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니? 나는 떠오른 사람이 한 백 명쯤 되는 것 같아. “맞아, 이런 사람이 꼭 있지” 하고 통쾌해 하다가 문득 깨달았어.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어쩌면 이미 누군가에겐 그런 사람일 수도 있지. 민선이 너도 잘 알지 않니? ‘이상한 여자’가 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야. 이상한 여자들을 경멸하는 한편 자신 역시 이상한 여자가 되고 마는 삶은 너무 흔한 것 같아. 소설 속에서 ‘불쾌한 인물’로 묘사되는 고모는 그렇게 불쾌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공포의 내력을 ‘나(조카며느리)’에게 들키게 돼. 고모가 가진 공포의 내력은 남성 중심적인 가정 내에서 여성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예민함 같은 거였어. 너와 내가 친가와 인연을 끊었을 때, 가만 생각해보면 우릴 열받게 한 사람들은 죄다 여자들이었어. 공교롭게도 우리 역시 고모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는데 집안 남자들이 이 모든 갈등 상황을 잘 눈치채지 못했던 게 기억이 나. 남성들은 날 때부터 지닌 권력을 위해 예민함과 톡 쏘는 말로 무장한 여자 어른들을 떠올려 봤어. 마치 여성들에게만 이어져 내려오는 유전병을 발견한 것 같기도 해. 그런데 가족을 벗어나면 ‘이상한 여자’. ‘불쾌한 여자’의 혐의를 벗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너와 나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다. 지금 당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김미진에 대한 정확한 정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결론 역시 그녀의 소설을 통해 얻게 된 어떤 해석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새롭게 확신하게 된 것, 판단하게 된 것, 앞뒤를 짜맞춰 알아낸 것, 그런 것들이다. -<오물자의 출현>


민선이 넌 외가가 없고 친가와는 이혼 후 멀어지게 됐어. 자연스럽게 나와 석희도 민선이 너와 셋이서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가지고 살 수 있었지. 가부장의 권력이 닿을 길이 없는 가족 형태였어. 그럼에도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 끝내 이상한 여자로 만드는 무언가는 세상에 널려 있더라. 나이가 서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커녕 일부분만 보고 판단하며 가차없이 미지의 영역에 던지는 사람들이 많았어. 하나의 책을 펼쳐 보이듯 내 모든 걸 까발려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계속 예민하고 이상한 여자애가 됐어. 이젠 이상한 아줌마, 이상한 할머니가 될 일만 남은 것 같아.


민선아, 이쯤되면 내가 왜 <디아더스>를 비롯한 각종 공포물을 좋아하게 됐는지 알 것 같니? <디아더스>에서 아이들의 엄마(니콜 키드먼 역)가 왜 그렇게 예민한지, 왜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지, 관객은 반전 이후가 아닌 영화의 시작부터 비극을 이해하기 시작해. 나는 수많은 공포영화를 보면서 주로 여성의 형상을 한 괴이한 존재를 맞닥뜨릴 때, 비명을 지르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부터 천천히 그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작품을 골라내고 있어. 그건 내 인생 역시 조각조각들을 가져다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면 공포물이 되기에 손색없는 상태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야.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되며 언제든 이해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거, 그래서 그 모습이 기괴하고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는 걸 너무 잘 알아. 아마 민선이 너의 삶 일부를 공포물로 각색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야.


사람이 사람을 완벽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해. 끼워 맞춰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잘 모르는 영역은 공란으로 놔두는 거야.

우리에게 공란이 허락되는 만남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으스스한 밤, 기분 좋은 서정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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