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 안되어서 묵직한 택배가 하나 왔다. 요새 뭘 시킨 적이 없는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동생이 대학교에 입학하면 노트북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나눴던 게 머릿속을 번뜩 스쳤다. 아빠는 수술 준비 때문에 엄마보다 일주일 정도 먼저 입원해서 지내면서도 노트북으로 계속 뭔가 작업하고 있었다. 아, 회사 일만 바빴던 게 아니었구나.
⌜아빠가... 주문했었나 보다.⌟
말없이 택배 상자를 뜯던 동생은 결국 눈물을 쏟았다.
거실에는 새 장식장이 놓였다. 수술 전에 엄마가 주문해서 밝은 원목으로 새로 짠, 높고 큰 장식장이었다. 그 안에는 우리 가족의 모든 역사가 들어 있었다. 가족사진 몇 장, 동생과 내가 엄마・아빠에게 써준 편지, 우리가 어릴 때 만든 점토 인형들, 엄마가 시인으로 등단했을 때 받은 상패, 아빠가 세례를 받았을 때 엄마가 선물한 십자수. 아빠가 퇴원하면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며 엄마가 사두었던 찻주전자 세트도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거기에 들어갔다.
추억을 모아둔 편백향 장식장의 닫힌 문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는 엄마의 뒷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작아 보였다. 그 순간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억울함이 속에서 치밀었다. 우리에겐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배신당하다니. 그 조그만 희망이 상처를 후벼 파는 흉기가 되어서 돌아오다니. 나는 기대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다시는 가지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도.
나는 미래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어졌다. 가끔 화장터에서 마주쳤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한 사람은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자, 다른 한 사람은 내 또래의 긴 생머리 여자. 여자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건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동생이었다. 두 사람 모두 활짝 웃고 있었다. 꽃같이 젊은 사람들. 어쩌면 어느 날에는 그 자리에 내가 있을지도 모르지.
몇 달이 지나 나는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한동안 하루, 딱 하루씩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바보 같은 일탈도 해보고, 인턴 자리를 얻어 매일 출퇴근도 하다 보니 상처가 조금씩 무뎌지는 듯했다. 나는 어딘가에 멈춰 있는데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 가끔 이상했다. 어느 날 퇴근길 지하철에서 큰 소리가 나서 돌아봤더니 웬 아저씨가 옆자리에 앉은 스님에게 영문 모를 시비를 걸고 있었다.
⌜요즘은 의학이 발전해서 사람이 100살까지 산다는데! 예? 스님!⌟
스님은 점잖은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으며 대꾸하지 않았고, 눈살을 찌푸리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별 감흥도 없이 그 꼴을 지켜보았다. 100세 시대라는데 왜 우리 아빠는 50년이 끝이었을까. 좀 더 살아서 여유로운 시절도 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대수롭지 않고 고요했다. 나는 영영 이상해져 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