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는 자신을 ‘르우르우’라 소개했다. 그 비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 턱을 치켜들며 루루는 코를 벌름거렸다. 루루는 무언가를 자랑하고 싶을 때 코가 벌름거렸다. 아이가 반나절동안 지켜본 결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루루는 어릴 적 대문 집 꼬마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그땐 나도 꼬마도 친구가 될 줄 알았지. 루루의 코가 또다시 벌름거렸다. 루루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에도 코를 벌름거렸다.
그 꼬마도 어디로 갔어? 아이는 좋은 곳으로 갔다는 엄마를 떠올리며 물었다. 루루의 코가 또다시 벌름거렸다. 뭐, 그 비슷하지만, 어디로 간 건 아니야.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직 이 집에 사는 거야? 아이는 녹슨 대문을 가리켰다. 그런데 왜 친구가 안 됐어? 싸웠어? 루루는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좁은 우리 안에서는 무리였다. 아이와 루루는 낮 시간의 한적한 골목처럼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내 루루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가족이란 걸 잠시 잊은 것뿐이야. 그냥 잊고 있는 거야. 이름을 붙여주던 때가 기억이 나면, 그러면…… 돼.
아이는 잊어버리라고 하던 엄마를 떠올렸다. 아빠의 집을 나와 시간이 흘러도 아이의 등에 든 푸른 물은 지워지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의 멍든 등에 약을 발라주며, 엄마는 이제는 우리 둘뿐이니 잊어버리면 되는 거라 했다. 그러나 정작 잊지 못한 사람은 엄마였다고 아이는 기억했다. 아이가 울거나 투정을 부리며 엄마는 화를 내며 말했다.
엄마 말 안 들으면 아빠가 잡으러 온다.
그때마다 아이는 호랑이 곶감 같은 아빠가 잡으러 온다는 사실보다, 엄마의 한숨 같은 표정에 겁을 먹고 울음을 그쳤다. 아이는 큼큼대는 루루의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뭐 하는 거야? 토끼를 앞에 두고서는 예의 없게. 루루는 어느새 르우-르우-를 발음하던 거만한 토끼로 돌아와 있었다. 아이는 그게 반가워 기꺼이 사과를 했다. 이번에는 루루가 물었다.
너는 어딜 가던 중이었니?
그제야 아이는 제가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답을 선뜻하지 못하는 아이를 루루는 까맣고 큰 눈이 빤히 들여다보았다.
……몰라. 무작정 걸어왔어.
너는 여행을 하고 있구나.
여행?
사람들은 떠도는 걸 여행이라 하더라.
어떻게 하는 게 여행인데?
여행은 낯선 곳에 가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거야.
아는 사람은 못 만나?
아는 사람이라……. 누굴 만나고 싶은데?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가 아빠의 집을 나오던 그 새벽에, 아이는 물었었다.
엄마, 우리 어디로 가?
모른단다. 하지만 좋은 곳으로 가게 될 거야.
아이는 뒤늦게야 엄마와 자신이 여행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아는 사람인 아빠는 만나지 않고 낯선 사람들만 만났구나. 아이는 여행이란 말이 마음에 들었지만 왠지 슬퍼졌다.
여행을 떠나는 아이와 엄마를 비춰주던 하얀 반달이 어김없이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루는 코를 벌름거리며 물었다. 벌써 가는 거야? 가는 거야? 루루는 화가 날 때도 슬플 때도 아쉬울 때도 코를 찡긋거렸다. 여행을 시작한 아이는 길을 떠났다.
루루와 헤어지고 아이는 한참을 걸었다. 걷고, 걷고, 아이는 여행을 했다. 그러다 다리가 아파진 아이는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만 수그리면 개찰구는 언제든지 지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철에 타고 내렸다. 전철을 탄 아이는 따뜻하게 데워진 은색 의자에 앉았다. 몸이 따뜻해지니 졸음이 몰려왔다. 아이는 까닥까닥 고개를 젖히며 졸다가 어느새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는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는 제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드니 아주머니가 자신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하늘색 옷을 입고, 한 손으로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움켜잡고 있었다. 집에 가야지. 하늘색 옷을 입은 아주머니가 말했다. 여기가 어딘가요? 아이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끝이란다. 역이 끝나는 곳이야. 아이는 졸린 눈으로 아슴아슴한 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짙어져 있었다. 아이는 의자에서 내려섰다. 은색 의자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하늘색 옷을 입은 아주머니가 물었다. 혼자 갈 수 있겠니? 가야 할 곳조차 모르는 아이에게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어차피 혼자 못 간다 해도 데려다 줄 수도 없어. 여길 다 청소해야 하거든. 아주머니는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지하철이란다' 라며 힘없는 웃음을 푸후, 내뱉었다. 긴 전철을 다 쓸어야지 나도 집에 갈 수가 있어. 아이가 있던 자리를 쓰는 아주머니의 등이 몹시도 굽어보였다. 엄마도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빌딩을 다 청소해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아빠의 집을 나와도 엄마에게서는 늘 파스냄새가 났다. 아이는 숨을 참고 엄마 등에 파스를 붙였다. 그때마다 파스가 말리기라도 할까 봐 아이의 손끝이 달달 떨렸다. 엄마가 파스를 붙이고 꽁꽁거리는 밤이 늘어갈수록 엄마와 초콜릿을 나누어 먹는 날은 줄어만 갔다. 아이 엄마는 더 이상 아이의 초콜릿 묻는 입술을 빨아주지 않았다.
아이는 어둠 앞에 서서 발을 뻗었다. 굵게 칠한 노란 선에 발이 닿았다. 그때 하늘색 옷을 입은 아주머니가 아이를 불러 세웠다. 이거 네 꺼니? 분홍색 토끼 귀가 달린 머리띠였다. 루루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하늘색 옷을 입은 아주머니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머리띠를 건넸다. 어서 가렴. 집으로 가야지.
아이는 노란 선을 넘었다. 싸늘한 바람이 아이를 덮쳤다. 아이는 계단을 뛰어올라 역 안으로 들어섰다. 마지막 전철이 지나갔는데도 역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사람들은 박스로 저마다의 성을 만들었다. 두꺼운 박스와 무관심한 눈빛으로 성벽을 만든 사람들은 드러누워 있거나, 술을 마시거나, 취해 있었다. 아이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가까이 가지 않기 위해 길 가운데로 걸었다.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머리띠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손바닥이 아파왔다. 손을 펴보니 빨간 자국이 남아있었다. 아이는 손에 쥔 분홍 토끼 귀를 머리에 썼다.
거기, 토깽이 꼬마!
머리띠를 쓰자마자, 누군가 아이를 토끼라 불렀다. 우렁찬 목소리였다. 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쪽에서 한 남자가 아이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몹시 키가 큰 남자였다. 키가 큰 남자는 손목과 발목을 껑충 드러낸 작은 옷들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우스운 꼴을 하고도, 웃었다.
남자에게서 술 냄새가 나지 않기에 아이는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남자에게서는 옅은 지린내가 났다. 아이는 잠시 숨을 참았다 훅, 내뱉었다. 너 혼자 돌아다니는 거냐? 여긴 너 같은 꼬맹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추울 뿐이었다. 남자는 연이어 물었다. 밥은 먹었냐? 아이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주머니 속 초콜릿이 떠올랐다. 남자는 아이에게 쭈글쭈글한 은박지에 싸인 김밥을 건넸다. 반만 먹어라. 김밥을 받아 든 아이는 다른 한 손으로 초콜릿을 내밀었다. 금박지 사이로 녹은 초콜릿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남자는 핫, 헛웃음 쳤다. 김밥 값이냐? 남자는 싱글거리며 아이의 토끼 귀를 슬쩍 튕기고는 금박 포장을 벗겨 냈다. 남자는 입도 컸다. 한 입에 초콜릿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이는 초콜릿을 베어 물려는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