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남자를 키 큰 아저씨라 불렀다. 남자도 아이를 토깽이 꼬마라 불렀다. 남자는 점심때가 되면 토깽아, 꼬맹아 하고 아이를 불러 무료 급식소로 데려갔다. 둘은 기다리는 줄이 길어질까 봐 뛰듯이 걸었다. 아이의 분홍 토끼 귀가 팔랑거렸다. 걸으며 아이와 키 큰 아저씨는 퀴즈놀이를 했다. 문제는 언제나 같았다. 무슨 음식이 나올까요? 그럼 키 큰 아저씨는 호기롭게 음식이름을 댔다. 오늘은 기름 동동 뜬 뭇국이야. 이런, 콩나물국이겠는 걸. 식판을 받아든 아이가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면 키 큰 아저씨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씩 웃었다. 말간 뭇국이 나온 날, 아이는 정답을 맞히는 비법에 대해 물었다. 키 큰 아저씨는 국물을 다 비우고야 대답해주었다.
상상을 해. 상상을 하면 이루어지거든.
상상이요?
육개장을 상상하면 육개장이 나오고, 미역국을 상상하면 미역국이 나오는 거지.
에이, 거짓말.
아이는 남자의 코를 손끝으로 눌러 주었다.
진짜라니깐.
용을 상상한다고 용이 나와요? 뿔 달린 말을 상상한다고 진짜로 볼 수 있어요?
바보구나, 그런 것들은 이미 다 있어. 많은 사람들이 상상했으니깐.
있을 리가 없잖아요.
팔이 여덟 개 달린 사람도 있고, 개 줄에 묶인 호랑이도 있어. 세상에 없는 건 없어. 말하는 토끼도 있잖니?
루루는 진짜예요.
거봐라.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은 없어.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건 쉬운 일이야.
아이는 고개를 들어 키 큰 아저씨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한참 위에 있는 키 큰 아저씨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너도 바라는 게 있으면 상상을 해.
키 큰 아저씨의 웃는 얼굴이 아이를 더욱 헷갈리게 하였다. 아이는 도리질을 쳤다. 그러자 거위 같던 아빠의 울음이 귓속에 울렸다. 아이는 고개를 더 세차게 저었다. 커다란 두 손이 아이의 뺨을 붙잡았다. 다 진짠 걸. 팔이 여덟 개 달린 아이도, 개 줄에 목이 묶인 맹수도, 다 내 눈으로 직접 본 걸. 키 큰 아저씨는 아이를 무릎에 앉혔다. 여전히 키 큰 아저씨에게서는 옅은 지린내가 풍겨왔다.
시베리아를 아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몹시 추운 곳이란다. 아이가 물었다. 여기처럼요? 키 큰 아저씨는 왼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아름답단다.
아기 호랑이의 엄마, 아빠의 고향은 시베리아였어. 아기 호랑이는 작고 뼈가 드러나게 마른 녀석이었어. 젊었을 적에는 내가 수리공 일을 좀 했는데, 동물원 안에 있는 사육사 숙소에 막힌 하수구를 뚫으러 갔다가 그 녀석을 보게 된 거야. 개 줄에 묶인 호랑이 새끼라니. 웃음을 안 터질 수가 없니. 크르렁, 그 녀석 그래도 제법 맹수답게 이빨을 드러내며 울더구나. 그 뒤로 사육사 숙소에 하수구, 싱크대, 창틀을 고치러 갈 적마다 그 녀석을 보았지. 사육사들 이야기를 귀동냥해보니 그 녀석의 엄마, 아빠는 별 볼일 없는 종들이었어. 고향인 시베리아를 떠나 동물원으로 오자 시름시름 앓고 매일같이 울었단다. 그러니 더 작은 동물원으로 옮겨질 수밖에.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기 호랑이는 따라 보낼 수가 없어 사육사들은 숙소로 데리고 왔다고 하더라. 사육사들이 우유를 먹이면서 애완용 호랑이를 키우고 있는 거였지.
아이는 개 줄에 묶인 아기 호랑이를 떠올려 보았다. 아이의 상상 속에 아기 호랑이는 자꾸 기운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빠 호랑이는 술을 마셨고, 엄마 호랑이는 아빠 호랑이의 발톱에 찢긴 채로 살아갔다. 그래서 아기 호랑이도 강아지처럼 약하게 태어났다. 아이는 아저씨의 이야기를 중얼거려 보았다. 뭐가 그리 골똘하냐? 아이는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힘없는 호랑이를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그리고는 짐짓 톤을 높여 말했다. 팔이 여덟 개 달린 아이 이야기도 해주세요. 그러나 이번에는 키 큰 아저씨가 고개를 저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아이는 키 큰 아저씨를 따라 고개를 흔들었다. 나중에, 나중에 해주마. 다 해버리면 나중에 할 이야기가 없어져. 키 큰 아저씨는 아이를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그 손길이 왠지 성급해 아이는 더더욱 영문을 몰라했다. 밤에 올 터니 혼자 놀고 있어라. 늦지는, 않을 거야. 아이는 엄마의 출근을 배웅하던 그때처럼, 착한 아이답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 큰 아저씨도 엄마처럼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늦지 않겠다던 키 큰 아저씨는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밤이 되면 숨겨두었던 두꺼운 박스를 들고 아이의 자리로 돌아오던 키 큰 아저씨였다. 아이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는 남아있던 얇은 신문지를 덮었다. 꼼꼼히 덮었다 싶었는데도 자꾸 시린 바람이 들어왔다. 그래도 아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더더욱 눈을 꼭 감았다. 홀로 잠이 들 때면 아이는 눈을 뜨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야 아무도 없는 제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의 귀가가 늦어지면서 아이에게 생긴 버릇이었다.
얼마인지도 모를 시간이 흘렀을 때 어디선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역 내에서 이런 일은 흔했다. 사람들은 밤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셨다. 아이는 술을 마시면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엄마를 향하던 아빠의 발길질이 떠올라 아이는 감은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나 낯익은 목소리에 아이의 귀에 들어왔다. 카랑카랑 역내를 울리는 소리의 주인은 키 큰 아저씨였다. 아이는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눈만 말똥히 떴다. 혀가 꼬부라진 듯 발음이 피식 새어나가는 키 큰 아저씨의 목소리가 아이의 귀에 생생히 들려왔다. 키 큰 아저씨는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목까지 쉬었는지 음성이 칼칼했다.
그 계집애기 말이야. 팔이 여덟 개나 달린 거. 기억들 안나? 여기서 태어난 애 말이야. 기억이 안 날 리가 있나. 팔이 자그마치 여덟 갠데. 박영감! 박영감이 애 보기 전까지만 해도 탯줄 두고는 입맛을 쩝쩝 다셨잖아. 내가 그 계집애 좀 기억하지. 그년 팔 중에 제일 위에 있는 팔은 성철 형 닮았고, 그 아래팔은 권 씨를 닮았었잖아. 그치? 맨 밑에 팔은 박영감을 쏙 빼다 닮았고. 아무튼 애가 제 아빠들하고 붕어빵이었어, 붕어빵.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놔- 놔- 외마디 비명 같은 외침이 들리더니 킬킬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키 큰 아저씨의 웃음 사이로 다른 아저씨들의 욕지거리가 섞여왔다. 그래도 키 큰 아저씨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이는 감은 눈이 바르르 떨렸다. 욕지거리 커지고 밀치며 투덕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이는 그날 꿈을 꾸었다. 꿈에서 본 엄마의 등이 새파랬다. 살색은 하나도 없이 파랬다. 아이는 열심히 엄마의 등에 파스를 붙였다. 그러나 붙여 놓은 파스는 자꾸만 작아지고, 엄마의 등에 물든 푸른 물을 점점 넓어져만 갔다. 파스를 붙이느라 애를 써대는 아이의 눈가로 눈물 같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병원에서 들은 꺼이꺼이 거위 같은 울음소리였다. 아이는 아빠라는 생각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고개를 빼들고 주위를 둘러봐도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파란 등을 한 엄마도 어느샌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아무리 사방을 헤매어도 거위 같은 울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눈을 뜬 다음에야 아이는 그 울음의 주인이 바로 키 큰 아저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키 큰 아저씨는 어느새 아이 곁에 모로 누워 있었다. 키 큰 아저씨의 몸에서 지린내가 아닌 술 냄새가 났다. 아이는 재빨리 눈을 다시 감았다. 키 큰 아저씨의 울음은 잦아들고 있었다. 키 큰 아저씨는 아이의 어깨의 팔을 둘렀다. 아이는 숨을 참았다. 키 큰 아저씨는 아이를 꼭 끌어 앉으며 귓속말을 했다.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아이 여덟 개 팔 중 세 번째 팔은 날 닮았더구나.
키 큰 아저씨가 잠이 들자, 아이는 몸을 일으켰다. 키 큰 아저씨의 숨결에서 옅은 비린내가 났다. 아빠에게서 나던 냄새였다. 이마에는 깊게 주름이 파여 있었다. 아이는 키 큰 아저씨의 이마를 제 손바닥으로 가렸다. 찡그린 이마를 가리자 한결 편안해 보였다. 아이는 아저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도 비밀 하나 말해줄게요.
키 큰 아저씨 얼굴이 웃고 있는 듯도 했다.
우리 엄마는 등이 아파 죽었어요. 나도 상상을 해요.
다음 말을 잇기 위해 아이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때맞춰 키 큰 아저씨는 몸을 뒤척였다. 푸후, 아이는 숨을 토했다. 아이는 말을 멈추고, 이마에 올린 손을 거뒀다. 키 큰 아저씨는 여전히 찌푸리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는 도로 자리에 누웠다. 몹시 추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