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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정 Aug 18. 2023

아이 여행을 하다(4)


  입 안에서 하얀 떡이 자취를 감추자 아이는 일어섰다. 여자는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여자에게 말했다. 이제 가야 해요. 여자는 끄덕였다. 아이는 여자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졌다. 주머니 속에 초콜릿이 하나 남았지만, 그건 키 큰 아저씨가 준 선물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분홍 토끼 머리띠를 빼 여자의 머리에 씌어주었다. 똑똑한 토끼예요. 뭐든 다 가르쳐줄 거예요. 토끼 귀가 생긴 여자는 여전히 말똥히 아이를 바라봤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듯해 아이는 동물원에 갈 것이라고 했다.


  토끼도 하마도, 사슴도 있는 곳이에요. 거기엔 호랑이도 살아요.


  아이는 손을 흔들었다. 토끼 귀가 생긴 여자도 아이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아이가 키 큰 아저씨에게 안녕이라 했을 때, 키 큰 아저씨는 손을 흔들어 주는 대신 초콜릿을 주었다. 여덟 개의 팔을 가진 아기 이야기를 들은 다음날이었다. 아이는 가야 한다고  했다. 키 큰 아저씨의 눈이 루루처럼 커졌다. 너도 내가 비겁하다 여기니? 아이는 가로저었다. 그 애가 날 닮았다고 말하지 않아서야? 아이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너도 내가 그 애를 버렸다 생각하는 거니? 그래서 떠나는 거니?  

  여행 중이에요. 그래서 가는 거예요.

  아이가 고갯짓을 멈추고 말했다.

  여행? 여행을 왜 하는데?  

  여행을 해야 여행이 끝나니까요. 여행이 끝나야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대요.


  키 큰 아저씨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나랑 같이 있지는 않을래?


  아이는 팔이 여덟 개인 아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키 큰 아저씨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는 말했다.


  그 애는 멀리 떠나 버렸는걸.

  상상을 해요.

  상상?

  다시 만나는 상상을요. 이제부터 상상을 해요.


  여덟 개의 팔을 가진 아기의 아빠인 키 큰 아저씨는 떠나는 아이에게 초콜릿 하나를 주었다. 녹여 먹으렴. 아이는 그때처럼 초콜릿을 잠바 주머니에 넣었다.

   전철 안 사람들은 아이를 피했다. 아이가 앉은 자리만 사람이 없이 널찍했다. 아이에게서도  이제는 키 큰 아저씨와 같은 냄새가 났다. 동물원에 가는 길이니 괜찮다고 아이는 부끄러워하는 제게 속삭여 주었다. 동물원에 도착한 아이는 매표소 구멍으로 세 번 접힌 천 원짜리 지폐를 밀어 넣었다. 키 큰 아저씨가 준 것이었다. 아이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어린이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네게 부탁이 있단다. 내 상상이 이루어졌는지 알고 싶어.


  키 큰 아저씨는 떠나려는 아이를 붙잡았다. 그래야, 상상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 같아. 개 줄에 묶인 호랑이. 그 애가 시베리아로 갔는지 알고 싶어. 네가 물어봐주겠니?  키 큰 아저씨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는 개 줄에 묶인 아기 호랑이의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었다.

  어느 날, 키 큰 아저씨는 아기 호랑이게 살코기를 내밀었다. 얼마간의 자금을 가지고 장사라도 할 요량으로 터전을 옮길 마음을 먹었던 키 큰 아저씨의 작별 인사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기 호랑이는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심지어 절대 잘라줄 필요가 없다고 설레발을 치며 사온 고기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기 호랑이는 고기 냄새를 몇 번 맡는가 싶더니 우유가 담긴 제 밥그릇으로 돌아가려 했다. 키 큰 아저씨는 우유 그릇을 빼앗았다. 아기 호랑이가 낮게 울었다.


  널 봤다구. 산속을 휘젓고 다니는 널 말이야. 아마 거기는 네 고향이었을 거야. 넌 아주 날쌔, 사냥 솜씨도 제법이었어. 이런 살코기를 얼마나 맛있게 뜯어먹었는데.


  아기 호랑이는 까치발을 든 채 앞발을 내두르고 있었다. 발이 가닿는 곳은 빼앗긴 우유 그릇이었다. 키 큰 아저씨는 우유 그릇을 내려놓았다. 아기 호랑이는 그릇에 머리를 들이댔다. 할짝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내 말을 믿으라고. 내 상상을 믿어. 너는 굉장히 멋진 호랑이였어.


  키 큰 아저씨는 사육사들의 숙소로 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터는데,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아기 호랑이가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키 큰 아저씨는 그것을 끄덕거림이라 여겼다. 호랑이의 머릿짓에 맞춰 목줄에 달린 방울이 울리고 있었다.

      



  아이는 호랑이를 찾아 걸어 들어갔다. 기린과 얼룩말, 오랑우탄을 스쳐 지나갔다. 날이 흐렸다. 오전인데도 하늘이 어둑했다. 어딘가 다들 춥고 지쳐 보여 아이는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울음소리조차 내는 동물이 없었다. 아이는 이름 모를 말을 보았고, 사자무리도 보았다. 호랑이와 사자는 친구일 거라 생각한 아이가 사자를 불렀으나, 루루보다 더 권태로운 표정만이 답해져 돌아왔다. 드넓은 동물원을 저 홀로 걷는 것만 같아 아이는 슬퍼졌다. 텔레비전 속 동물원은 이런 곳이 아니었다.

  아이는 동물원에 오는 것이 처음이었다. 한 번 가볼 뻔한 적이 있었다. 술에 취했는데도 아빠가 큰소리 한번 치지 않은 이상한 날이었다. 아이는 불안한 마음으로 시계만 들여다보았다. 12시가 되면 신데렐라처럼 마법이 풀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 아빠는 12시가 되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잠이 들며 아빠는 아이에게 말했다. 내일이 일요일이지? 동물원이나 가자꾸나. 우리도 사는 것처럼 살아봐야지. 김밥 좀 싸두라고. 마지막 말은 엄마를 향했다.

  다음날 아이는 눈을 떴을 때, 이미 방안이 밝았다. 늘 어둑한 반지하방이 밝아질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는 것에 놀라 아이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빠와 엄마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아이는 시계를 보았다. 분침과 시침이 어지럽게 놓여 있어 시간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아침이 한참 지났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울고 말았다. 울고 있는 아이를 향해 베개가 날아왔다. 시끄러워, 아침부터 재수 없게 질질 짜고 난리야. 칼칼한 아빠의 목소리였다. 아이는 마법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

  아이의 눈가가 젖어왔다. 아이는 제 눈물이 흐르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손등으로 훔친 눈물은 차가웠다. 고개를 드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롱대롱 매달린 눈 때문에 부예진 눈으로 아이는 동물원을 두리번거렸다. 동물들은 어느새 제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발밑이 질척거렸다. 문득 키 큰 아저씨의 상상도 마법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끝나는 아주 잠깐의 속임수 같은 마법이 아닐까. 호랑이를 찾으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꾸 몸이 무거워졌다. 아이의 옷 속으로 흘러든 눈은 얼음이 되어 몸을 찔렀다.           

  아이는 쉬고 싶었다. 너무 오래 걸어왔다. 모든 게 그리워 눈가에 자꾸만 눈이 맺혔다. 그때, 아이 앞에 호랑이 두 마리가 스쳐 지나갔다. 내리는 눈 탓에 그 모습이 어룽거렸다. 그러나 아기 호랑이의 엄마, 아빠란 것은 알 수 있었다. 엄마 호랑이와 아빠 호랑이는 동물원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깟 담장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엄마 호랑이와 아빠 호랑이는 성큼 나는 듯 뛰어갔다. 아이는 호랑이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상상을 해, 그럼 이루어진다고. 키 큰 아저씨의 말이 맴을 돌았다. 이제부터 상상을 해요. 자신의 말도 들려왔다. 아이는 아기 호랑이를 찾으러 가는 엄마 아빠 호랑이를 오랫동안 상상했다. 눈발이 거세지고 아이의 웅크린 몸 위로 하얀 눈이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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