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에 닿는 선득한 기운에 아이는 눈을 떴다. 아이의 눈에 들어온 건 머리카락이 몹시 헝클어진 여자였다. 아이는 제 뺨을 부여잡은 여자를 말끄러미 바라봤다. 아마도 여자는 자신이 누운 자리의 주인일 듯싶었다. 아이는 ‘고맙습니다’와 ‘미안합니다’ 사이에서 망설였다. 자신이 덮고 있는 것도 여자의 비닐인 듯했다. 혹여 빼앗기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아이는 비닐을 움켜쥐었다. 이곳은 추웠다. 뺨을 잡은 여자의 손도 시렸다. 여자의 뒤로 보이는 하늘이 시리도록 맑았지만, 그래서 더 추울 뿐이었다. 아이의 코에서 콧물이 비죽 나왔다. 아이는 루루처럼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나 콧물은 미끄럼이라도 타듯 스르르 여자의 검은 손으로 흘러내렸다. 아이는 여자의 손에 눌려 펭귄처럼 오므려진 입술을 움직이려 애썼다.
아, 아, 파, 요.
여자는 손을 거두고는 아이의 빨간 뺨을 가리켰다. 아이는 여자가 가리키는 자신의 뺨에 손을 대보았다. 달아오를 듯 뜨거웠다. 며칠 째 콧물도 나오고 있었다. 아이는 얼른 소매 끝으로 콧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코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아프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아이는 그저 아프다 말해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을 뿐이었다. 아빠가 발로 엄마를 내리치려 하면, 아이는 엄마의 등을 감싸며 외쳤다. 아파요! 그러면 춤이라도 추듯 들려진 아빠의 발이 허공에서 멈춰졌다. 물론 아프다는 외침이 언제나 성공했던 것은 아니었다. 실패가 잦아지자, 엄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오던 그 새벽녘에 아이는 울먹였다.
코가 길어질 거예요. 아빨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못 지켰어요.
아빠의 낡은 집이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머리 위로 내뱉어진 엄마의 작은 한숨소리를 아이는 들었다. 엄마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숙여 아이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이러면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지지 않는단다' 라며 손가락으로 아이의 코끝을 꾹 눌러주었다.
아이가 여자를 올려다보니, 어느새 헝클어진 머리의 여자도 아이를 따라 코를 누르고 있었다. 아이와 여자는 마주 보며 열심히 코를 눌렀다. 아이는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아 손을 멈췄다. 여자도 따라 멈추고는 아이 옆에 앉았다. 여자는 때가 져 반들거리는 치마에 손바닥을 문지르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하얀 떡이었다. 여자는 하얀 떡을 반으로 나눠 작은 쪽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떡을 건네는 여자의 손도, 손톱도 까맸다. 떡은 시큼했다. 찐득하게 입천장에 달라붙는 떡을 씹으며 아이는 여자에게 웃어 보였다. 여자는 웃지 않은 채 입만 열심히 움직였다. 여자의 누런 이 사이로 하얀 떡이 보였다. 아이는 여자가 누군지 궁금했을 뿐 무섭지는 않았다. 키 큰 아저씨는 어린애들을 잡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지만, 루루는 여행이란 낯선 이를 만나가는 거라 했다.
아이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여행을 가르쳐준 이는 루루였다. 루루는 우리에 갇힌 하얀 토끼였다. 그날은 아기가 병원을 빠져나와, 루루의 말대로라면 여행을 시작한 첫날이었다. 아이는 한낮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바쁜 사람들은 자꾸만 작은 아이와 부딪쳤다. 아이는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낮은 담장들이 이어진 골목은 조용했다. 그제야 아이는 웅크린 몸을 폈다. 그때 찰그랑,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걷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소리를 따라 골목 귀퉁이를 돌자 녹이 슨 대문이 보였다. 대문 아래에는 철장으로 된 우리가 있었다. 우리 안에 토끼가 보였다. 하얀 토끼였다. 그리고 뚱뚱한 토끼였다. 뚱뚱한 토끼는 우리에 몸이 꽉 낀 채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몸을 뒤척이기라도 하면 우리가 덩달아 흔들려 찰그랑 소리를 냈다.
안녕? 토끼는 대꾸가 없었다. 제 몸 움직일 공간을 찾느라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만 있었다. 아이는 우리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아이의 눈에도 토끼의 노력은 헛일로만 보였다. 우리는 너무 작았고, 토끼는 너무 컸다. 우리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하얀 토끼털이 밖으로 비죽 나와 있었다. 아이는 토끼털을 만졌다. 엉킨 털들이 빳빳했다. 아이의 손길을 느낀 토끼가 코를 벌름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흔들린 우리가 다시 찰그랑 소리를 냈다. 당황한 아이는 손을 주머니에 감췄다. 주머니 속에 있던 네모난 초콜릿이 만져졌다.
초콜릿을 철장 사이로 넣어 보았으나 토끼는 그저 힐금거리기만 했다. 아이는 저 홀로 초콜릿을 천천히 녹여 먹었다. 아이의 엄마는 초콜릿을 좋아했다. 일을 마치고 오는 길에 초콜릿을 하나씩 사가지고 와 아이와 나누어 먹고는 했다. 아이가 초콜릿을 배어 물면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바보, 초콜릿은 통째로 녹여 먹어야 맛있는 거라며 엄마는 초콜릿 범벅이 된 아이의 입술을 쪽쪽 빨고는 했다.
아이의 주머니에는 초콜릿이 많이 있었다. 복지원 사람들이 사준 것이었다. 깊은 잠이 든 엄마를 병원으로 옮긴 날이었다. 아무리 해도 엄마가 깨어나지 않아 아이는 좀 놀라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 복지원 사람들이 물었다. 어린 나이에……. 밥은 먹었니? 뭐 먹고 싶은 건 없니? 아이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잠에서 깬 엄마가 배고파할 것만 같았다. 우리 엄마는 초콜릿을 좋아해요. 사람들은 아이에게 초콜릿을 사주었다. 아이는 초콜릿을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아이는 초콜릿을 입에 물고는 토끼가 두어 번 더 몸을 뒤척이는 걸 보았다. 오도카니 앉은 아이는 집주인 할머니가 키우던 뽀삐를 떠올렸다. 뽀삐도 작은 집에 갇혀 늘 답답해했다. 뽀삐는 화장지 광고에 나오는 강아지와는 전혀 닮지 않은 거대한 개였다. 거대한 뽀삐는 작은 집이 답답하여 울곤 했다. 그러면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다리를 떨며 2층 계단을 걸어 내려와 답답하지 라며 어르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면 뽀삐는 신나게 마당을 내달려 문 밖으로 나갔다. 아이는 토끼 우리의 문을 찾았다. 우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철장 밖으로 튀어나온 토끼털이 같이 만져졌다.
이상해. 여기에는 문이 없어.
토끼가 인상이라도 쓰듯 코를 벌름거리더니, 비로소 입을 열었다.
원래 없어.
왜?
필요가 없으니깐. 문은 나가고 들어올 때나 필요한 거니깐.
나간 적이 없어? 여기서만 산 거야?
그래.
그럼 언제 밖에 나오는데?
죽을 때가 되면.
아이는 조금 놀라 입을 다물었다.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았지만, 누군가에게 직접 그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아무도 아이에게 죽음을 말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너희 엄마는 좋은 데로 가신 거란다. 그러나 엄마가 좋은 곳으로 간 걸 축하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아무도 엄마가 어디론가 갔다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는 그곳이 사실 좋은 곳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바빠 보였다. 복지원 사람들은 아이를 엄마에게로 데려갔다. 엄마는 하얀 천을 가슴께까지 덮고 있었다. 아이의 주머니 속 초콜릿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초콜릿도 못 먹게 된 엄마를 보며 아이는 죽는다는 건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엄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놀라 뒷걸음질 친 아이에게 익숙한 냄새가 끼쳐왔다. 술 냄새였다. 아빠였다. 아빠가 기어코 엄마를 찾았구나. 꺼이꺼이 거위처럼 우는 아빠를 보며 아이는 문득 엄마가 등이 아파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착한 학생처럼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아빠 곁을 지나 문을 나섰다. 문밖에서도 아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살아있는 것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