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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Sep 05. 2020

사티바와 사피엔스

벼 이름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먼저 이름을 묻는다. 상대를 만날 때 이름을 모르면 제대로 부를 수가 없다. 애매모호하게 ‘저기요’라고 부르는 것은 온전한 하나로 인정하기보다는 여럿 중에 그저 하나로 여기는 것이다. 이는 상대에 대한 예바른 태도가 아니다. 상대를 마주할 때 이름을 묻는 것은 상대에게 미더운 악수를 청하는 손짓이다. 정중히 손을 맞잡는 것은 서로 얘기를 나눌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사람을 부르는 이름은 여럿이다. 태어나기 전에 붙인 태명이 있고, 집에서 어릴 적에 부르는 아명이 있으며, 학교에서 친구들이 부르는 별명도 있고, 연인끼리 부르는 애칭이 있으며, 사이버 공간에서 내세우는 닉네임도 있다.      

이들 이름 중에 공식적인 이름은 호적의 성명이다. 성명은 성씨와 이름이 합쳐진 명칭인데, 성씨는 집안을 나타내고 이름은 개인을 나타낸다. 집안에서 이름을 지을 때는 나름의 규칙이 있는데, 바로 항렬이며 이 항렬은 세대를 나타낸다. 이름의 항렬만 봐도 자신과 동기간인지 아버지뻘인지 아들뻘인지 알 수 있다. 같은 항렬에서는 같은 돌림을 따른다. 우리 형제의 이름은 종훈, 종호, 종인 등 ‘종’ 자 돌림이고, 아들뻘은 지원, 희원, 도원 등 ‘원’ 자 돌림이다.     

생물 명칭 중에 사람 호적 같은 명칭이 있는데, 바로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가 창안한 학명이다. 학명은 두 단어로 된 라틴어인데, 앞이 속명이고 뒤가 종명이다. 가령, 인간의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인데, 호모는 속명으로서 ‘사람’이라는 뜻이고, 사피엔스는 종명으로서 ‘슬기롭다’라는 뜻이다. 즉 호모 사피엔스는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인류의 학명이다.      


현재 인류는 사피엔스 종이 유일하지만 예전에는 몇몇 종이 더 있었다. 그 종으로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솔로엔시스’ 등이 있었으나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Oryza sativa

벼 학명은 오리자 사티바(Oryza sativa)다. 속명인 오리자는 ‘벼’고, 종명인 사티바는 ‘재배하다’이다. 즉 오리자 사티바는 ‘재배하는 벼’라는 뜻이다. 식물 종명에는 사티바가 또 있다. 대마라고도 부르는 삼이다. 삼 학명은 캐나비스 사티바(Cannabis sativa)다. 한 교실에 성씨는 다른데 이름은 같은 '김철수'와 '박철수'가 있듯 말이다.    


벼 속명인 오리자(oryza) 어원은 그리스어인 오루자(oruza)다. 나일강의 문명 발상지인 이집트에서는 벼를 아루스(arus)라고 하는데, 이 말이 그리스로 전파되어 오루자(oruza)가 되었다. 


그럼 오루자(oruza)라는 말은 어디서 온 말일까? 벼의 전파경로를 따러 거슬러 올라가면 아라비아의 우르지(urzy)라는 말에서 유래했고, 이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뷔리제(vrize)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인도의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에서 벼를 뷔리히(vrihi)라고 부른 데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rice

벼는 영어로 라이스(rice)다. 이 rice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영어 rice는 이탈리아어의 riso가 원조가 되어 프랑스어의 riz, 독일어의 reis를 거쳐 영어의 rice가 생겨난 것이다. 

벼 학명인 오리자(oryza), 산스크리트어 뷔리히(vrihi), 그리스어 오리자(oriza), 영어 라이스(rice)에 이르기까지 ‘r’ 자가 벼라는 말에 명맥을 잇고 있음이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벼’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인도 산스크리트어 ‘뷔리히’가 여진족 말로 백미(白米)를 뜻하는 ‘베레’로 변했다가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벼’로 정착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벼의 기원지로 추정되는 태국, 미얀마, 베트남 등에서 유래한 말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바디(badi)'로 변형되고 우리말 ‘벼’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모두 원산지로 추정되는 인도나 동남아 등지에서 사용하는 벼 명칭 발음이 전래되어 우리말의 ‘벼’가 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중국 남부에서는 벼를 'nei', 'ni', 'nep', 'nuan'이라 하는데, 중국 자전을 보면 옛 발음을 ‘니(ni)’라고 적고 있다. 황해도에서는 쌀밥을 ‘이팝’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고어는 ‘니밥’, 즉 ‘니’와 ‘밥’이 합쳐진 것이다. 북한에서는 쌀밥을 ‘이밥’이라고 부른다. 북한의 경제 목표는 인민들이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인데, 여기서 이밥은 흰쌀밥을 말한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는 벼를 ‘나락’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낱+알 → 낟알 → 나달 → 나락이 된 것이다. 여기의 ‘낱’은 <니(稻) + 알>이 <날>로, 날이 <낟>으로, 낟이 <낱>으로 형태변화를 거쳐서 생겨난 말이다. 쌀 속에 섞인 벼 알갱이를 ‘뉘’라고 하는데, 이것도 ‘니(ni)'에서 유래된 걸로 여겨진다.     


벼를 뜻하는 화(禾)는 나무(木) 위에 한 획을 더해서 표현되었다. 이는 이삭이 익어 고개를 숙인 모양이다. 아울러 위로부터 이삭과 줄기와 잎과 뿌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모양이기도 하다.      


벼는 한자로 도(稻)다. 도(稻)를 풀어헤치면 벼(禾)를 손으로(爫) 절구(臼)에 넣고 찧는 것이다. 도(稻)는 조선시대의 주요 농서에 많이 나온다. 지금도 벼와 관련한 용어에는 도(稻)가 들어간다. 벼농사를 수도작(水稻作)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물이 있는 논에서 기르는 벼’라는 뜻이다. 모든 벼는 논에서 자라는 걸로 아는 사람들은 굳이 수도작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하겠지만, 벼 중에는 논이 아닌 밭에서 자라는 벼도 있다. 이를 수도(水稻)에 반하여 육도(陸稻)라고 부른다.      




새로 만난 친구 이름을 알았듯 이제 벼 이름을 알았다. 벼와 더 친해질 수 있겠다. 정리하자면, 밥을 할 수 있는 나락이 달리는 식물이 ‘벼’이며, 한자로는 도(稻), 영어로는 라이스(rice)다. 학명은 오리자 사티바(Oryza sativa)인데, 속명인 오리자는 벼를 뜻하고 종명인 사티바는 재배를 뜻한다.      


우리의 공식적인 이름이 호적 성명이듯, 벼의 학술적인 이름은 학명이다. 우리 성명은 성씨와 이름이 합쳐진 것인데, 벼 학명도 속명과 종명이 합쳐진 것이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성과 이름을 같이 부르지만 사적인 자리에서 친구끼리는 이름만 부르곤 한다. 생물의 명칭도 공식적인 논문이 아니라면 종명만 부르기도 한다. 인간은 사피엔스, 벼는 사티바 이렇게.     


사람과 벼가 서로 얘기할 수 있다면, 사람이 들녘을 걷다가 벼를 만나면 이렇게 부를 것이다.

“어이, 사티바!”

그럼 벼도 대답하겠지.

“그래, 사피엔스!”     

사람의 주식이 벼니 사피엔스와 사티바는 사사롭다. 이름도 둘 다 '사'자가 들어간 사피엔스와 사티바니 더욱 사사(?)롭다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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