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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평한 논

물을 골고루 고르게

by 시골뜨기

논은 평평해야 한다. 논바닥이 평평해야 논물을 반반하게 담을 수 있으며 모를 고르게 심을 수 있다. 벼는 평평한 논에서 잘 자란다.


논과 저수지는 둘 다 물은 담고 있지만 그 까닭은 다르다. 저수지는 많은 물을 가두어야 하기에 깊을수록 좋다. 그러므로 저수지의 바닥은 선사시대 토기처럼 가운데가 깊다. 하지만 논은 물을 담되 고르게 담아야 하므로 바닥 전체가 쟁반처럼 판판하다. 논은 바닥이 고른 작은 저수지다.



논이나 저수지나 물낯은 반반하다. 수면이 고른 이유는 공기가 중력의 힘으로 물을 누르기 때문인데 물은 어디에 놓이든 곧바로 평평해진다. 맨 위의 물낯은 항상 그렇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도랑물이 내를 따라 흘러 저수지로 모이듯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모인다. 저수지에 모인 물은 번지질한 논처럼 두루 번지며 골고루 펴진다.


물 윗면이 평평하다고 해서 바닥면까지 평평한 건 아니다. 물 윗면은 판판하게 퍼지지만 아랫면은 물을 담은 틀 모양대로 굴곡진다. 석고 반죽을 틀에 부었을 때 윗면은 평평하지만 아랫면은 형틀대로 모양 난다. 바닷물 깊이는 산을 엎어놓은 듯 앞바다에게 난바다로 나갈수록 깊어지지만 논물 깊이는 논 가장자리나 가운데나 켜켜이 쌓은 시루떡처럼 매한가지로 고르다.


논물 깊이는 일정하다. 벼를 재배하는 논은 그래야만 한다. 일반 수영장 깊이는 위치에 따라서 다르다. 입구 쪽은 허리 깊이더라도 중간께 들어가면 가슴 깊이에 이르고 더 안으로 들어가면 머리가 잠길 정도로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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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수영장은 그렇지 않다. 깊이는 얕으며 전체가 같다. 어디서든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전체 바닥이 얕아야 한다. 발목 깊이면 아이들은 흥미를 잃을 것이고 배꼽 깊이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할 것이다.


논은 유아전용 풀장과 같다. 얕으면서도 전체 깊이가 같다. 모내기 때 논에 심기는 모는 아이 같은 어린모다. 못자리에서 싹튼 볍씨는 한잎 두잎 잎을 내며 자라는데 잎 수에 따라 모의 나이를 센다. 첫 잎이 나오면 1엽기, 세 번째 잎이 나오면 3엽기다. 못자리가 유치원이라면 논은 학교다. 모 나이가 7~8엽기가 되면 못자리를 떠나 논으로 자리를 옮긴다. 유치원생이 예닐곱 살이 되면 초등학교에 가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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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은 모를 받기 위해 진작부터 채비를 했다. 쟁기질하고 써레질한 후 번지질까지 해서 논바닥을 고르게 한 후 물 대고 모 맞을 준비를 마친다. 모내기 날, 드디어 어린모들이 논에 들어와 줄지어 자리했다. 모가 자리 잡고 잘 서도록 논물을 빼고 논바닥을 질펀하게 했다. 어린모가 자리 잡은 후 다시 논에 물을 댄다. 어린모는 아이들처럼 물을 좋아한다. 논은 어린이수영장처럼 물이 찰랑찰랑 찼다.


모가 물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 전체가 잠길 정도로 깊게 대면 안 된다. 모 키의 2/3 정도가 좋다. 아이들이 가슴 높이의 물에서 재밌게 놀 듯 어린모도 가슴 깊이로 논물을 대준다. 예닐곱 살 아이들의 키가 고만고만하듯 어린모의 키도 어슷비슷하다.


논바닥이 고르면 모는 같은 깊이로 잠길 것이다. 만약 논바닥이 고르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깊은 곳에 심긴 모는 온몸이 잠길 것이고 얕은 곳에 심긴 모는 섬의 나무처럼 물 밖으로 드러날 것이다. 둘 다 살기 힘든 상황이다. 잎 끝까지 잠긴 모는 숨이 가빠 헐떡대고 흙이 드러난 곳에 심긴 모는 말라죽을 판이다. 그러므로 벼를 잘 기르려면 모가 일정한 깊이로 물에 잠기도록 논바닥을 고르게 해야 한다.


모판 모는 평등하게 싹이 터서 평등하게 자란다. 땅거죽을 비집고 일제히 올라오는 볍씨 새싹은 까까머리처럼 촘촘하고 깔끔하다. 고루고루 빛을 받고 물을 받아 똑같은 키로 고르게 자라서 똑같은 날에 논에 심긴다. 평등한 세상을 보고 싶으면 논으로 와서 벼를 보면 된다. 논은 평평하고 벼는 평등하며 그 풍경은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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