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물관리
해가 가장 높은 하지와 더위가 시작되는 소서 무렵, 낮은 길고 날은 덥다. 이 덕에 풀은 잘 자란다. 벼도 잘 자란다.
이때 쑥쑥 자라는 벼는 내리막길을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이 자동차의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밟으면 연료가 더 공급되어 자동차의 속도는 더 오른다. 마찬가지로 이 벼에 논물을 충분히 대주면 영양분이 공급되어 벼는 더 잘 자란다.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던 자동차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속도를 줄일 때가 있는데, 과속단속카메라가 있는 경우다. 고속도로에 과속단속카메라가 있는 곳은 교통사고가 많이 났던 곳이거나, 급커브길이라서 안전운행을 위해 속도를 줄여야 할 곳이다.
벼가 한창 자랄 때에 논물을 끊어서 벼의 자람을 주춤하게 할 때가 있다. 벼가 크는 대로 내버려 두면 벼가 위험할 때이다.
7월 초, 벼가 한창 자랄 때인데 농부는 갑자기 물꼬를 내서 논물을 모조리 빼버렸다. 무논에서 자라는 벼인데 물을 빼면 어떻게 자랄까? 금붕어가 살고 있는 어항의 물을 빼면 안 되듯이 논물도 빼면 안 되지 않을까?
논물을 빼니 논은 말라갔다. 초여름 햇살은 뱀처럼 논바닥을 살살 기며 갈라진 불혀로 바닥을 핥았다. 곤죽처럼 흐물흐물하던 논흙은 청포묵처럼 쫀득쫀득하더니 홍시를 포기한 곶감처럼 꼬들꼬들 말랐다. 그러더니 밋밋한 논바닥에 손바닥의 손금 같은 실금이 새겨졌다. 이 실금은 이맛살의 주름처럼 점차 골이 깊어졌다.
이윽고 농부는 논물을 댔다. 물꼬에서 물이 들어왔다. 논흙이 다시 젖고, 실금에 물이 차고, 논바닥이 물에 잠기더니 벼 무릎까지 차올랐다. 마른논이 무논이 되었다.
열흘만이다. 농부는 열흘간 논물을 뗀 후 열흘만에 다시 댔다. 벼가 한창 자랄 때, 더불어 벼가 물을 가장 많이 흡수할 때 논물을 뗀 까닭은 뭘까! 자라지 말라는 말인가?
그렇다! 자라지 말라는 거다. 웃자라지 말라는 거다.
벼가 한창 자랄 때 논물을 떼면, 끓는 물에 찬물 부으면 끓던 물이 잦아들듯 벼의 자람은 주춤한다. 벼는 그저 잠깐 멈칫할 뿐 죽지는 않는다. 비유하자면 벼는 금붕어가 아니라 개구리다. 금붕어는 열흘 물 없으면 죽지만 개구리는 죽지 않는다. 벼가 그렇다. 며칠 물 없다고 죽는 것은 아니다. 밭에 사는 벼도 있지 않는가. 다만, 자람이 주춤할 뿐이다.
벼가 자라는 도중에 논물을 떼는 것을 ‘중간 물떼기’라고 한다. 이삭패기 40일 전에 열흘 동안 논물을 빼서 논을 말리는 과정이다. 이때는 벼 생육시기상 헛새끼를 칠 때다. 중부지방에서 중만생종을 재배할 때 7월 상순이다.
모내기 후 모가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는 때를 '활착기'라고 한다. 뿌리내린 벼는 포기를 벌며 줄기를 늘리는데, 이때를 '분얼기'라고 하며 새끼 칠 때라고도 한다. 새끼 칠 때는 다시 두 때로 나누는데, 참새끼와 헛새끼다. 참새끼 칠 때 일찍 나온 줄기에는 벼이삭이 제대로 달리지만, 헛새끼 칠 때 늦게 나온 줄기에는 벼이삭이 달리지 않는다. 이삭이 나오더라도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다.
벼를 심는 이유는 벼알을 얻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이삭이 달리지 않는 줄기는 낼 필요가 없다. 달걀을 생산하는 양계장의 수평아리처럼 논의 벼에게는 헛새끼는 필요 없는 존재다. 그래서 헛새끼 칠 때 논물을 떼서 포기를 못 벌게 하고 웃자람을 방지한다. 달리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페달을 밟는 것처럼.
중간 물떼기를 하면 쓸데없는 줄기를 줄인다. 또한 흙속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 뿌리의 활력을 좋게 한다. 더불어 물을 찾아 뿌리가 땅속 깊게 내리도록 한다. 아울러 비바람이 불어도 뿌리 깊은 벼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헛새끼 칠 때의 물떼기는 일석이조를 너머 일석사조다.
나무는 틈나는 대로 자란다. 그 자람이 지나치면 오히려 나무에게 해로울 수 있다. 너무 빽빽하면 빛이 골고루 비치지 못하고, 너무 웃자라면 쓰러지기 쉽다. 동산바치는 가지치기를 통해 나무의 균형을 잡아주고 모양을 갖춘다.
벼도 막 자라면 부대낀다. 줄기가 빽빽하면 빛과 바람이 통하지 않아 병에 걸리기 쉽고, 키가 크면 태풍이 오면 쉽게 쓰러져서 벼알이 상할 수 있다. 벼도 나무처럼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가위로 가지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논물을 떼서 가지를 줄이는 것이다. 벼농사의 물떼기는 조경수의 가지치기다.
모를 심은 후 논바닥은 계속 물에 잠겨있어 공기가 닿지 못한다. 근 달포 가웃 산소가 부족한 논은 환원상태가 되어 해로운 환원물질이 많이 생긴다. 밤새 창문을 닫아 놓으면 방 안의 공기가 탁해지듯. 아침에 창문을 열고 환기하듯 논에도 환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논물을 빼는 것이다. 물을 제거하여 논바닥에 공기가 직접 닿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논흙 안에 있는 환원물질은 공기 중으로 빠지고, 신선한 공기는 논흙으로 스며든다. 중간 물떼기는 창문을 열고 환기하듯 논흙에 맑은 산소를 넣어주는 것이다.
땅속에서 물이 치솟는 옹달샘이 있으면 우물 팔 까닭이 없다. 하지만 물이 나오지 않는 곳에서는 땅속 깊이 우물을 파야 물을 얻을 수 있다. 깊게 팔수록 물을 찾을 기회가 많고 물의 양도 많다. 논에 늘 물이 고여있으면 벼 뿌리는 굳이 물을 얻기 위해 깊이 뿌리를 뻗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논물을 떼면 뿌리는 물을 얻기 위해 땅속으로 깊게 뿌리를 뻗는다, 땅속 깊이 우물 파듯이. 뿌리가 깊게 내리면 땅속 깊은 곳의 수분과 양분도 이용할 수 있으며, 가물어도 시들지 않는다. 목마른 자 우물 파듯, 물 빠진 논벼가 뿌리를 깊게 내린다.
건물을 지을 때 먼저 땅을 깊게 파서 기초를 놓는다. 기초가 깊을수록 그 건물은 안전하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뿌리가 땅속 깊이 뻗을수록 식물은 쓰러지지 않고 안전하다. 용비어천가에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벼 뿌리가 깊으면 벼 여물 때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덜 쓰러진다. 논물을 떼면 뿌리는 자연스레 깊게 내려서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여름에 물을 떼어 뿌리를 깊게 내림은 가을에 태풍 와도 쓰러지지 않게 하는 채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