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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Oct 04. 2020

볍씨 하나 심어 낟알 일백 얻다

벼 한살이

1. 벼농사의 시작, 볍씨 준비


이천에서는 이제껏 <추청> 벼를 심었는데, 보통 아키바레라고 부르는 일본에서 도입한 벼다. 앞으로는 국내에서 육성한 <해들>과 <알찬미> 품종으로 대체할 예정이다. 예전에는 <자채벼>라는 품종을 재배하여 임금님께 진상했었다.  

자채벼
조선시대에 이천에서 재배되었던 올벼인데, 밥맛이 좋아 임금님께 진상되었던 쌀이다. 농서인 <금양잡록>에는 ‘자채(自蔡)’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까끄라기가 있고 이삭은 날 때는 색깔이 희다가 성숙하면 황색이 된다고 하였으며, <증보산림경제>와 <행포지>는 이천에서 나는 올벼가 좋다고 하였다. 


이천 지역의 알맞은 모내기 때는 5월 15일 즈음이다. 모내기 25~30일 전에 모판에 볍씨를 파종하는데, 볍씨를 파종하려면 소독하고 싹을 틔우는 데 10일가량 걸린다. 그러므로 보통 모내기 40일 전에 볍씨를 준비한다.


자가채종한 볍씨를 종자로 쓸 경우엔 지난해 수확하여 보관 중인 볍씨를 자루에서 꺼내 검불과 까락을 제거하기 위해 탈망작업을 하여 깔끔한 종자를 만든다. 다음은 알찬 종자를 고르기 위해 소금물가리기 작업을 한다. 비중을 이용하여 쭉정이를 제거하고 비중이 높은 충실한 종자만을 고르는 작업이다. 소금물의 비중은 1.13으로 맞추는데, 물 18L에 소금 4.5Kg을 녹이면 이 비중이 된다. 


정부보급종은 소금물가리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소독약제가 표면에 처리된 볍씨를 소금물에 담그면 약제가 희석되어서 소독효과가 떨어지므로 소금물가리기를 생략하고 바로 볍씨소독을 한다. 보급종은 품종혼입을 막기 위해 별도의 지정된 장소에서 종자를 생산하며, 키다리병을 방제하기 위해 살균제를 종자의 표면에 처리한다. 보급종은 겉이 불그레한데, 이는 소독약을 처리했다고 표시하기 위해 붉은 물감을 들인 것이다.  


좋은 종자를 선택하는 것은 풍년농사의 첫 단추다. 이제 올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한다. 지금은 비록 한 톨의 볍씨지만 이 한 톨의 볍씨가 백 톨의 벼 낟알로 거듭날 것을 꿈꾸며 종자를 준비한다.



2. 이보게, 볍씨! 이제 눈을 뜨게나.


지난해 가을부터 잠을 자고 있는 볍씨를 이제는 깨워야 한다. 성미 급한 개나리는 진작 눈을 떠서 벌써 꽃이 한창인데, 볍씨는 아직도 자루 안에서 쿨쿨 자고 있다. 억지로 깨웠다간 잠투정을 부릴 수도 있으니 아이를 깨울 때 창문을 열고 아침햇살을 방 안으로 들이며 부드럽게 다독이듯 볍씨도 넌지시 토닥여야 한다.


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씨앗들은 봄이 왔다고 해서 무턱대고 눈을 뜨지는 않는다. 자기들이 자랄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이 되었을 때, 비로소 조심스레 눈을 뜨며 잠에서 깨는 것이다. 성급한 종자는 따뜻한 날이 며칠 이어지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가 이어서 들이닥친 추위에 혼쭐나기도 한다.


어쩌다가 한겨울 중에 꽃을 피운 개나리를 볼 경우가 있다. 아직은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데 이르게 꽃망울을 터뜨린 꽃을 보노라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개나리만을 탓할 수만은 없다. 여러 가지 환경 변화 탓에 몸안의 호르몬 이상으로 인한 현상일 수 있다. 환경호르몬으로 인해 벌이 벌통을 떠나고,  어미새가 새끼를 돌보지 않는 증상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식물 종자는 일정기간 휴면기간을 갖는다. 성숙이 덜 되어서가 아니라 안정적인 번식을 위해 물리적, 시간적으로 다양한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종자마다 적당한 조건이 마련될 때 비로소 눈을 떠서 새로운 세대를 이어가는데, 종자가 눈을 뜨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온도와 습도의 조건이 알맞아야 한다.


4월 7일

볍씨를 깨우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건강한 벼로 자랄 수 있도록 소독하는 것이다. 갓난아기도 여러 가지 질병을 방지하기 위해 예방주사를 맞듯이 볍씨는 키다리병 등을 방지하기 위해 종자소독을 한다. 키다리병에 걸린 벼는 키가 큰 증상을 보이는데, 결국은 여물지 못하고 죽는 병이다.  

키다리병  
병원균의 학명은 Gibberella fujikuroi이며, 대형과 소형 분생포자를 형성하며 후막포자도 형성한다. 벼꽃이 필 때에 감염된 종자를 파종하면 못자리에서 발병이 시작된다. 심하게 감염된 종자는 발아하면서 말라 죽고, 중간 정도로 감염된 종자는 전형적인 키다리 증상을 나타낸다. 약하게 감염된 것은 본 논에 심기더라도 가지치기가 다소 적고 생육은 어느 정도 된다. 그러나 생육 도중에 발병 환경이 좋아지면 도관 내에 수없이 많이 형성된 포자가 밖으로 자라나 줄기 표면에 흰 가루 모양의 포자가 형성된다. 이런 포자들은 이삭이 나올 때에 다시 건전한 벼 포기를 감염시켜 종자감염이 된다. 


자가 채종한 종자는 키다리병을 방지하기 위해 살균제를 푼 물을 30℃로 하여 볍씨를 담근 후 48시간 두어야 한다. 소독을 마친 볍씨는 꺼내서 맑은 물에 헹군 뒤에 잠을 깨우기 위해 볍씨담그기를 한다. 요즘 농가에는 볍씨발아기가 있어서 많은 양의 종자를 편리하게 볍씨소독과 볍씨담그기를 할 수 있다. 


4월 9일

나는 잠자는 볍씨를 깨우기 시작했다. 

깨웠다가 아니라 깨우기 시작했다고? 

그렇다.


아직 단잠 중인 볍씨를 억지로 흔들어 화들짝 깨우는 것이 아니라 부스스 일어날 수 있도록 며칠 동안 온도와 습도의 환경을 마련했다. 볍씨는 적산온도 100℃ 즈음에서 잠이 깬다. 즉, 물의 온도가 20℃인 경우에는 5일간 볍씨를 물에 담가야 한다. 

4월 9일에 20℃의 물에 볍씨를 담갔다가 닷새 후인 4월 14일에 건졌다. 볍씨는 눈을 뜨기 전에 대사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호흡이 가빠진다. 그러므로 매일 새물을 갈아주어서 볍씨에 산소를 공급해주어야 한다.  


미지근한 물속에 잠긴 볍씨는 생각했을 것이다. 날이 따뜻하니 이제 눈을 떠도 될 것 같다고. 사실 바깥 환경은 볍씨가 눈을 뜨기엔 아직 이르다. 4월에 찾아오는 늦서리는 어린싹에게 혹독한 시련일 수 있다. 하지만 염려치 않아도 된다. 인간이 볍씨를 꼬드겨서 일찍 눈을 뜨게 할 때는 그에 대한 대책도 마련한다. 눈 뜬 볍씨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큐베이터(온실) 안에서 어린 시절을 안전하게 보낸다. 어린모가 외부환경을 견딜 만큼 충분히 자란 후에야 모내기를 하여 온실 밖의 논으로 내보내게 된다.


4월 14일

물 먹은 볍씨를 꺼내니 몇몇은 왕겨를 비집고 하얀 눈을 삐죽 내밀었다. 눈뜨기를 망설이는 볍씨들을 마저 깨우기 위해 볍씨 자루를 쌓고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거적을 씌워 32℃의 온도에서 이틀을 두었다. 이제 볍씨는 눈을 안 뜨고는 배길 수 없어서 너도나도 하얀 싹을 틔웠다.  



3. 씨를 벗고 모로 탈바꿈한 볍씨


싹튼 볍씨가 모판에 뿌려지는 것은 수정란이 자궁벽에 착상되는 것과 같다. 자궁벽은 모판이요, 자궁은 온실이다. 모는 육묘상자에서 달포 가량 자란 후에 논에 심긴다.


모판에 뿌려진 볍씨는 닻처럼 뿌리를 땅에 내리고, 돛처럼 떡잎을 하늘에 올리며 자리를 잡아간다. 점이었던 씨앗이 선이 되고 면이 되고 입체가 되면서 완전한 식물체로 자란다. 한 톨의 볍씨 안에 있던 씨눈은 단지 가능성만 가진 작은 점이었으나, 적당한 온도와 습도 조건을 만나니 제 모양을 갖춘 입체가 되었다. 내재적인 가능성과 외부적인 환경이 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온전한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볍씨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등의 양분을 가수분해효소로 분해하고, 사이토키닌과 옥신 등의 호르몬을 만들어서 씨눈의 자람을 부추긴다. 


모판은 갓난아이 같은 싹튼 볍씨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 육묘상자는 가로 60cm, 세로 30cm, 높이 3cm의 사각상자이다. 그 안에 상토를 채우고 물을 충분히 적신 후 볍씨를 뿌리고 다시 상토로 덮는 모판만들기를 한다. 

상토는 모가 뿌리를 잘 내리고 지탱할 수 있도록 부드러우며, 스펀지처럼 물을 잘 머금는다. 모가 자라는데 필요한 양분을 가지고 있으며,  pH4.5~5.5의 알맞은 산도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산흙에 낙엽 등을 섞어서 만들었으나 요즘은 대부분 공장에서 만든 시판상토를 사용한다. 


4월 16일

모판에 상토를 담고 싹튼 볍씨를 뿌려서 모판상자를 만들었다. 모판에 상토를 2/3 가량 채우고 볍씨를 골고루 뿌린 후 다시 흙덮기를 하였다. 


한 상자당 뿌리는 볍씨의 양은 130g인데, 대부분 농가들은 더 촘촘히 뿌리는 경향이 있다. 씨앗을 많이 뿌리면 많은 모가 자라면서 서로 부대끼고 약하게 자란다. 한 교실 안에 50명의 학생이 수업할 때와 30명의 학생이 수업할 때의 학습환경을 비교해보자. 많지만 약한 모보다는 적지만 튼실한 모가 풍성한 가을걷이의 꿈을 이루어줄 것이다. 사람이나 모나 어릴 때 병약하면 커서도 비실하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듯 모를 보면 벼를 알 수 있다.  

 

1 상자에 130g의 볍씨를 뿌릴 경우 볍씨 1포대(20kg)로는 150 상자의 모판을 만들 수 있다. 촘촘하게 뿌리는 경우는 종자 1포로 100 상자밖에 만들지 못하는데, 이 경우는 상자당 200g 정도를 뿌린 거다.


요즘은 모판상자도 시설된 공정육묘를 통해 대량으로 생산한다. 이천은 농협의 육묘장에서 절반 이상의 모판을 생산하여 공급하고 있다.


볍씨를 뿌린 후 모판을 거적 등으로 덮어 어둡게 한 상태로 30~32℃의 기온에서 이틀 정도 두면 싹이 5~10mm로 자라게 된다. 어린싹은 뽀얀 우윳빛인데, 이 싹을 갑자기 밝은 빛에 드러내면 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이삼일 시간을 두고 서서히 빛과 온도에 적응시킨다. 


싹튼 볍씨는 더 이상 씨앗이 아니다. 씨가 모로 탈바꿈하면 다시는 씨앗으로 돌아갈 수 없는 법, 

오로지 뿌리를 뻗고 잎을 내어 온전한 식물로 자라는 것만이 살 길이다.

싹튼 볍씨여, 잘 자라 다오. 아자!




4. 깜찍한 어린모들, 와글와글 재잘재잘


육묘상자에 뿌리내린 올망졸망 어린모들 시루 안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자란다.

도토리 키 재기하듯 누가 누가 더 크나 고만고만 견주면서 우쭉우쭉 자란다. 

어제는 이만큼, 내일은 저만큼 나날이 자라며 쪽빛을 더해간다.


다진 상토 위에 볍씨를 뿌리고, 그 위에 다시 상토를 뿌려 종자를 덮는다. 이 복토가 볍씨에게는 억압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생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박차다. 제 몸을 덮고 있는 흙의 무게를 이기고 새싹을 키운 볍씨는 어리지만 옹골진 생명력으로 당당히 살아갈 것이다.

볍씨 위의 흙의 무게는 억압이 아닌 북돋음이요, 시련이 아닌 훈련이다. 그 두께를 너무 가볍게 할 필요는 없다. 뿌리를 뻗치는 힘은 생각보다 대단한 걸... 그 뻗음은 제 몸을 이기고 흙을 이기고 밖으로 나온다.  


완전변태를 하는 곤충은 번데기에서 허물을 벗고 성충이 된다. 허물벗기의 과정이 안쓰럽다고 해서 사람이 곤충의 탈피를 도와줘서는 안 된다. 인간의 도움으로 쉽게 허물을 벗은 곤충은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을 수 있다. 곤충은 안간힘을 쓰는 허물벗기를 통해 당당히 날개를 펴고 성충으로서의 삶을 단련하는 것이다.  쓰러진 아이를 곧바로 일으켜 세워주기보다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격려하며 기다려주는 인내가 그 아이를 옹골지게 한다. 


볍씨 위에 살짝 복토를 한 모판의 볍씨는 뿌리를 내리면서 제 몸을 홀라당 드러내고 말았다. 그대로 속살을 내보이며 손발을 뻗는 싹튼 볍씨가 어쩐지 안쓰러워 보인다.

복토를 잘 한 모판의 볍씨는 어린싹을 쏙 내밀고 곱상하게 잘 자란다. 참으로 앙증맞고 깜찍하여 쓰다듬고 싶다. 떡잎을 벗고 첫째 잎, 둘째 잎, 셋째 잎을 내는 모는 나날이 키가 커가며 벼의 모양을 갖춰간다. 농부의 발길에 제비 새끼처럼 앙앙거리며 철철 주는 물을 쏙쏙 받아 마신다.   

파종 3일 후
파종 6일 후
파종 11일 후




아이가 자라면서 병치레를 하듯 모도 자라면서 병치레를 한다. 출아기부터 녹화기에 발생하는 '백화묘', 못자리 초기부터 중기에 발생하는 '입고병', 못자리 후기에 발생하는 '뜸모' 등이 모의 병치레다.

백화묘
엽록소 형성이 되지 않아 모가 백색 상태를 유지하는 증상
출아기에 고온이 계속될 때, 녹화 시에 강한 햇볕을 받았을 때 발생
입고병
모판상자에 곰팡이가 발생하며, 모를 잡아당기면 땅과 접한 부분의 줄기가 끊어진다.
상토의 Ph가 6 이상이거나 4 이하일 때, 출아 온도가 지나치게 높을 때, 주야간의 온도차가 클 때, 상토 수분이 많고 적음이 반복될 때 발생한다.
뜸모
모판상자에 곰팡이가 발생하지 않으며, 모를 잡아당기면 줄기가 끊어지지 않고 뿌리와 같이 뽑힌다.
너무 촘촘하게 씨를 뿌려 산소가 부족할 때, 수분이 부족할 때, 주야간의 온도차가 클 때 발생한다.
입고병
모 생리장해


볍씨를 뿌린 육묘상자는 못자리에서 키워 논으로 옮겨심기 위해 모내기를 하는데, 모를 기르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예전에는 논에다가 투명비닐터널못자리를 많이 했으나 요즘엔 부직포못자리나 공정육묘장에서 모를 많이 기른다. 

투명비닐터널못자리


남도지역은 부직포못자리가 많으나 이천지역의 경우는 비교적 시설화가 잘 되어있어 공정육묘를 통해 70%가량의 모를 농가에 공급하고 있다. 공정육묘장은 자동 볍씨파종기로 육묘상자를 만들고, 책장처럼 층층이 모판을 쌓은 상태에서 자동세차장처럼 물뿌리개가 레일을 따라 이동하며 켜켜이 물을 공급하고 있다.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내듯 대량의 모를 여러 번 길러낼 수 있다.  



고만고만 자란 어린모들은 유치원생들처럼 신나게 재잘거린다. 논은 볏모를 맞을 채비하고, 못자리는 어린모를 보낼 자세이다. 곤충이 허물 벗듯, 벼는 자리를 옮겨서 성장을 이룬다.

자, 이제 모내기가 코앞이다.  



5. 둥지 논이 모 맞을 채비를 마치다


사오월의 논은 차근차근 모내기를 준비한다. 신학기에 신입생들을 맞이하는 학교처럼, 논은 모를 맞이할 채비를 하였다. 논길엔 농기계가 쿵쿵거리며 황소걸음으로 오가고, 물 댄 논은 쏟아지는 햇살을 잔물결로 흩뿌리며 찰랑거린다. 촉촉이 젖은 논은 보자기처럼 보드랍다.  

써레질 후 물 댄 논


봄에 모를 맞이하여 여름내 키우고, 가을에 여문 벼를 보낸 후 후줄근한 몰골로 겨울을 나는 논. 논은 해마다 벼를 키우며 제 양분을 소진시키므로 그만큼 채워주어야 지속적인 생산활동을 할 수 있다. 하늘의 빗물을 통해서 상당량의 양분을 자연스레 충전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양분은 따로 보태줘야 한다. 벼알은 인간이 가져가되 볏짚은 논으로 되돌려주는 볏짚환원, 깊은 곳의 흙을 끄집어내어 겉흙과 속흙을 섞어주는 논갈이, 부족한 양분을 직접 투입하는 거름주기 등은 논이 해마다 나락을 생산할 수 있게 하는 밑심이다.

 

논갈이는 벼 뿌리가 잘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토양의 입단 형성과 융통성을 좋게 한다. 논갈이는 정도에 따라 깊이갈이와 얕게갈이, 시기에 따라 가을갈이와 봄갈이로 나눈다. 깊이갈이는 보통논, 미숙논, 볏짚이나 퇴비 등을 시용한 논에 실시하는데, 양분이 적은 속흙이 섞이므로 산도(pH)는 낮아지고 유기물과 인산은 적어지는 반면에 칼리나 규산 성분은 많아진다. 얕게갈이는 모래논이나 모래자갈논에 볏짚이나 퇴비를 시용한 논에 실시한다. 가을갈이는 미숙논이나 염해논에 실시하고, 모래논에 볏짚을 400kg 시용할 때는 반드시 가을갈이를 해야 한다. 봄갈이는 모래논이나 보통논에 실시하고, 유기물을 주지 않은 논은 봄갈이를 실시한다.  

쟁기로 논갈이한 논


예전엔 쟁기로 땅을 갈아엎은 후 써레로 흙덩이를 잘게 부스는 작업을 따로 했지만, 요즘엔 농기계가 발달하여 트랙터에 장착한 로터리로 쟁기질과 써레질의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트랙터로 논갈이를 할 때는 보통 모내기 전에 두 차례의 써레질을 한다. 첫 써레질은 로터리로 논을 갈면서 밑거름 살포작업까지 동시에 실시한다.

써레질 후 며칠 동안 물을 깊이 대서 논이 충분히 물을 머금게 한 후 다시 써레질을 한다. 곱써레질은 모내기를 바로 앞두고 실시하는데, 질퍽한 논흙을 곤죽처럼 갈아서 방바닥을 미장하듯이 반반하게 한다. 곱써레질 후에는 논물을 얕게 대서 모내기 한 모의 뿌리가 잘 자리하도록 한다. 


써레질


논두렁은 한번 만들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철 따라 손을 대어 보수해야 한다. 논둑에 드렁허리나 땅강아지 등이 구멍을 내면 논물이 새거나 둑이 무너질 수 있으므로 모내기 전에 삽이나 가래로 논두렁을 깎고 진흙으로 구멍을 막으며 손본다.  

논두렁 정비

 

밭에서 재배하는 밭벼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벼는 거진 논벼다. 논벼는 대부분의 생육과정을 물에서 자라므로 풍부한 물이 벼농사의 중요한 기반이다. 이천지역은 남한강 수계의 청미천, 복하천 등이 있어 지하수가 풍부하고, 논마다 지하수를 퍼올리는 양수기가 설치되어 물관리가 용이하다. 


5월의 논은 새가 알을 품으려고 마련하는 둥지와 같다. 지난해에도 그랬듯이 올해도 어린모를 품어서 벼로 잘 키워낼 것이다. 논은 벼를 통해 우리의 식량을 마련하는 생명의 보금자리이다. 



6. 모, 드디어 논에 뿌리내리다


손 모내기 


아까시나무의 달콤한 향이 은은한 5월 중순, 들녘마다 모내기가 한창이다. 격자 논은 민숭민숭한 대머리에서 송송한 까까머리로 모자이크를 만들어 간다. 밤마다 우렁각시가 논에 다녀간 걸까? 인기척은 드문데 칸칸의 논은 나날이 연둣빛으로 채워진다. 


모내기는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울력다짐 노동이었다. 품앗이를 통해 여럿이 모내기를 하는 날이면 들녘은 시끌벅적 흥겨웠다. 하지만 이것은 예전의 모내기 풍경이다.  지금은 모내기를 이앙기로 한다. 그것도 걸어 다니는 보행이앙기가 아니라 농부가 기계에 타서 운전하는 승용이앙기가 대부분이다. 너른 논들을 보면서 어느 세월에 저 들에 모를 다 심을까 하는 염려도 되지만, 승용이앙기는 수십 명의 몫을 거뜬히 감당한다. 이앙기가 모를 싣고 논을 지나가면 한 번에 6모숨의 모가 쏙쏙 심긴다. 한 마지기의 논을 10분이면 마칠 수 있다. 손모내기를 한다면 대여섯 사람이 시간 남짓 걸릴 면적이다.



이천시농업기술센터에서는 벼의 병해충 및 생육상태 등을 살피기 위해 30a의 논을 운영하고 있다. 그곳에 모내기를 했는데, 품종 비교를 위해 직접 파종하여 기른 다양한 품종들을 직원들이 일일이 손으로 심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모내기를 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이 풍경은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모내기 풍경이었다. 예전엔 고된 '노동'이었던 손모내기가 지금은 즐거운 '체험'이 되었다.   


모내기 전에 써레질 후 깊게 댄 물을 적당히 빼서 모가 잠기지 않을 정도(2~3cm)로 논물을 유지한다. 그전에 밑거름과 규산질비료 시비는 마쳐야 하며, 논바닥이 균일하도록 평탄작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내기 당일에는 육묘상자에 약제를 처리하는데, 이는 물바구미 등 해충과 병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모는 한 모숨에 서넛 줄기만 심는다. 허전해 보이기도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는 줄기의 마디에서 새로운 줄기가 나오는데 이를 새끼치기라고 한다. 모의 분얼은 1차, 2차, 3차까지 계속되어 이론상으로는 1개의 모에서 40개까지 가지가 나올 수도 있다.


한 모숨에 많은 줄기를 심으면, 벼는 새끼를 많이 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여 가지를 적게 낸다. 반면에 적은 줄기를 심으면, 벼는 더 많은 새끼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더 많은 가지를 낸다. 그러므로 굳이 많은 줄기를 심어서 모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 서넛 줄기만 심어도 나중엔 스물 가웃의 적당한 줄기로 늘어난다.


그리고 모 심는 간격은 1평방미터당 21포기를 심는다. 평당 70포기 정도다. 예전에는 더 촘촘하게 모를 심었지만, 점차 단위면적당 적게 심는 추세이다. 60 또는 50까지 줄여서 심기도 한다. 벼에게 충분한 생육공간을 보장하면 벼도 충분한 수량으로 농부에게 보답한다. 조바심이 나서 일찍 심으면 벼는 몸살이 나고, 욕심이 나서 많이 심으면 벼는 비실하게 자란 수밖에 없다.  


모내기 후 며칠 동안은 물을 깊게 대어준다. 그동안에 모가 논에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는 때다.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은 모는 본격적으로 새끼치기를 시작하며 어엿한 벼로 자란다.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 생명력을 곁에서 지켜보노라면 덩달아 생의 기운이 움튼다. 갈색 논이 얼룩얼룩 모자이크로 변하다가 연둣빛 논으로 변한 모낸 후의 논엘 가보라. 꿈틀대는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오월, 생명의 달이다.



7. 경쟁자인 잡초에게 야성을 배우자


논은 물이 흥건한 습지이며, 당연히 습지식물이 나고 자라는 곳이다. 농부는 논에서 벼 외의 식물이 자라는 것이 탐탁지 않기에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잡초를 제거하려 한다. 벼농사에 있어서 잡초는 큰 일거리다. 예전엔 이 잡초를 손으로 다 제거했었지만, 지금은 제초제의 힘을 빌어서 해결하고 있다.


제초제는 참으로 편리하게 잡초 문제를 해결한다. 모내기 전에 초기제초제를 뿌리고, 모낸 후 보름 정도 지나서 중기제초제를 살포하면 잡초 문제는 거의 해결할 수 있다. 요즘 새롭게 문제가 되는 잡초는 저항성 잡초다. 항생제를 남용으로 인한 슈퍼박테리아가 발생하여 항생제 치료효과가 없어지듯이, 제초제를 사용해도 제초효과가 생기지 않는 저항성 잡초가 발생했다.


오랫동안 같은 계통의 제초제를 계속 사용하면 나중에는 그 제초제를 살포해도 잡초가 죽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를 저항성잡초라고 한다. 우리나라 논잡초의 경우에는 물달개비, 알방동사니 등이 설포닐유레아계(SU계)의 약제에 대한 저항성이 나타나고 있어 잡초방제의 새로운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따라서 같은 계통 대신 다른 계통의 약제를 번갈아 사용해야 한다. 


잡초는 뭘까? 원하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풀이다. 즉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인 기준이다. 잡초의 대명사인 피도 예전에는 작물이었고, 예전에 작물이었던 달맞이꽃도 지금은 잡초이다. 벼농사에 있어서 왕골은 잡초이지만, 반면에 왕골농사를 하는 논에서는 벼가 잡초이다. 우리나라에 발생하는 논잡초는 약 100종이다. 이천지역에서 문제가 되는 논잡초는 올방개, 물달개비, 자귀풀, 가막사리 등이다. 


잡초는 씨를 뿌리기는커녕 해마다 제거하는데도 끊임없이 발생하는 까닭은 왜일까? 잡초 종자는 크기가 작고 이동성도 높으며, 휴면성도 복잡하여 오랜 기간 동안 생존할 수 있으며 특히 종자 생산량이 많다. 한 그루에서 보통 수백~수백만 개의 종자를 생산하며, 미숙한 종자라도 발아할 수 있다. 토양은 종자은행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잡초의 종자는 땅 속에서 오랫동안 휴면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발아하며 번식한다. 그러므로 잡초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논잡초의 분류는 생활주기에 따라서 일년생잡초와 다년생잡초로 나누고, 형태에 따라서 화본과(벼과), 사초과(방동사니과), 광엽잡초로 나눈다. 일년생잡초란 발생 후 일 년 사이에 개화하여 종자를 생산한 다음 고사하는 잡초를 말하고, 다년생잡초란 지상부인 잎과 줄기는 일 년 이내에 죽지만 지하부인 뿌리가 남아서 다음 해에 발생하는 잡초이다.

잡초의 잎 구분

  화본과와 사초과 잡초의 잎은 가늘면서 길고, 뿌리는 수염뿌리로서 비슷하여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화본과는 줄기가 둥글고 속이 비었으며, 마디가 있는 반면에, 사초과는 줄기가 대체로 삼각형이고 속이 차있으며 마디가 없다. 또한 화본과잡초는 잎집과 잎몸이 뚜렷하고 잎의 가장자리가 둔한 곡선을 그리는 반면에 사초과잡초는 잎집과 잎몸이 뚜렷하지 않으며 잎 끝이 비교적 뽀쪽하고 가운데에 능선이 있다. 광엽잡초는 잎이 넓어서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올방개

 

자귀풀


벗풀


잡초는 분명 벼를 힘들게 하는 경쟁자다. 그렇다고 해서  잡초를 모조리 없애려고 제초제를 마구 살포하다가는 벼와 인간도 피해를 볼 수 있다. 벼의 잡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들을 고려해야 한다.

제초제의 처리 시기와 양을 잘 조절해야 하며, 우렁이 등을 이용한 친환경농업과, 논갈이와 예초기 등을 이용한 방법 등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잡초의 씨를 말리겠다는 욕심은 오히려 농약중독, 토양오염, 노동력 낭비 등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잡초는 어쨌든지 잡초의 근성대로 살아남을 것이다. 잡초의 성질을 잘 파악하여 관리해야 하며 벼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타협을 봐야 할 것이다. 


재배벼는 잡초의 싸움 상대가 되지 못한다. 재배벼는 인간의 돌봄이 없다면 잡초에게 KO패를 당할 운명이다. 재배벼는 생산을 위해 자라지만 잡초는 생존을 위해 자라기 때문이다. 재배벼는 식량을 생산하기 위한 인간에게 길들여진 맞춤식물인 반면에, 잡초는 스스로 생존력을 터득한 야생식물이다. 식량을 위해 농사를 짓는 인간에게 있어서 잡초는 골칫거리지만, 잡초의 삶에 대한 의지와 야성은 배울만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8. 벼도 혀와 귀가 있어?


  

7월의 논은 풋풋한 초록 호수다. 스치는 바람결에 볏잎은 물결처럼 너울너울 살랑인다.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뛰어들어서 텀벙거리며 물장구도 치고, 발라당 드러누워 눈부신 하늘을 올려보고도 싶어 진다.

논은 호수처럼 판판하고 잔잔하다. 생명의 근원인 물을 담고 있어 수많은 생명체가 더불어 산다. 벼는 물론이고 벗풀, 올방개, 올챙이고랭이 등의 풀을 비롯하여, 물방개, 조개, 우렁이, 개구리 등의 세상이다. 이들은 서로 뒤질세라 다투듯이 잘도 자란다.  

                                  

벼는 얼마나 자랐나?

5월에 모내기를 할 때는 한 포기에 서넛 줄기였는데, 7월인 지금은 새끼치기를 통해 스물 줄기 이상으로 늘어났다. 벼의 키도 15cm 남짓하던 게 70cm로 부쩍 자랐다. 모낸 후 휑뎅그렁하던 논바닥은 이제는 초록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빼곡하다. 

모낸 지 60일 후


그러나 벼는 아직 아이다. 잎만 자란 벼는 아직 덜 자란 것이다. 벼알이 달릴 이삭이 잎집 밖으로 나오는 때가 비로소 어른이다. 그 이삭을 만들기 위해 벼는 우선 잎을 많이 내어서 양분을 만들고 있다.

이삭이 잎집 밖으로 나오는 시기를 출수기(出穗期)라고 하는데, 이천에서 재배하는 '추청' 품종의 이삭패기는 8월 중순이다. 출수기 이후에 벼는 수술과 암술이 만나 수정을 하고, 벼알이 여물어서 쌀이 되는 것이다. 아직은 이삭이 잎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잎 속에서 이삭이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쯤에 벼 줄기를 갈라보아서 어린 이삭의 상태를 보고 이삭 패는 날과 이삭거름을 주는 때를 가늠할 수 있다.  


벼의 성장상태를 살피기 위해 벼 밑둥을 세로로 갈랐다. 오래된 붉은 뿌리와 이제 막 나온 흰 뿌리가 보인다. 뿌리가 처음 나오면 하얏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피막이 형성되어 붉게 변한다. 밑둥 줄기 속을 보니 이삭은 보이지 않고 이삭 마디만 보인다. 벼도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어 무거운 이삭을 머리에 이고도 잘 견딘다. 대나무가 가는 데도 그렇게 높이 자랄 수 있는 이유는 속이 비었고,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이삭, 그러나 멀잖아 황금 이삭으로 여물 것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벼 줄기는 잎이 돌돌 말려있는 모양인데, 이 부분을 잎집이라고 한다. 잎집에서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잎몸이라고 한다. 잎집은 줄기를 둘러싸서 잎몸을 지탱하며, 잎몸이 햇볕을 받아 만들어낸 양분을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잎몸은 우리가 보통 잎이라고 부르는 부분을 말하며, 뿌리에서 흡수한 물을 증산하며 햇볕을 받아 광합성을 한다. 

    

잎몸과 잎집의 경계 부분에 바로 잎의 혀와 귀가 있다. 잎귀는 한 쌍의 갈고리 모양으로 줄기를 감고 있어 잎몸이 줄기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마치 두 팔로 잎집을 부둥켜안고 있는 모양새다. 잎혀는 줄기에 밀착하고 있어서 빗물 등이 잎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잎의 공기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벼와 비슷하게 생긴 피는 같은 벼과지만 이 잎혀와 잎귀가 없어서 벼와 구분할 수 있다.



9. 수줍은 벼꽃


벼잎이 무성한 논, 생생한 초록 물결이 그지없이 평온하다. 벼잎 무리의 부드러운 군무에 보는 눈길이 즐겁다. 초록은 평안함이다. 피곤한 눈도 초록을 보노라면 안정되어 차분해진다. 논이 이어진 초록바다가 그 빛깔을 계속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초록은 주황으로 변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아 말라죽었다.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잎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보다는 열매를 위한 과정이다. 언제까지나 푸른 잎으로만 자태를 뽐낼 수는 없다. 열매를 위한 양분을 충분히 흡수하면 이제 이삭을 내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어야 하며, 잎은 초록을 포기하고 황금빛으로 바래야 한다. 


이천에서 자라는 벼 중에 일부는 조생종이라서 일찍 모내기를 하여 추석 전에 수확하고, 대부분의 벼인 중만생종은 추석 후에 수확한다. 조생종은 7월 말부터 이삭이 패기 시작하지만 중만생종은 광복절 무렵에 이삭이 팬다. 그래서 팔월의 논은 이삭이 팬 희끄무레한 벼와 아직 이삭을 품은 초록의 벼가 공존하는 풍경이다. 



벼 잎줄기 속에는 이삭이 있다. 얼마나 자랐을까?

이삭패기 달포 전 즈음에 벼 밑동을 벗겨서 어린이삭이 생겼는지 살핀다. 어린이삭의 크기로 이삭 패는 날을 예측할 수 있는데, 1.5mm면 이삭패기 25일 전이다. 벼 이삭거름은 이삭패기 25~20일 전에 주는 것이 알맞다. 이삭 팰 무렵이면 겉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잎집이 통통해지며 배가 부른다. 해산(?)할 날이 가까운 것이다. 이삭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면 논은 초록빛이 바래지며 희어진다. 한 논의 벼 절반이 이삭 팰 때, 그날이 그 논의 출수기다.  


벼꽃을 보고 싶다! 벼도 꽃이 피냐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벼도 식물이므로 꽃이 핀다. 단지 화려한 꽃잎이 없을 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암술과 수술이 있는 꽃이 핀다.


벼꽃은 자신의 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꽃이 세상에 선뵈는 시간도 잠깐이다. 벼꽃을 보려면 아침에 나서야 한다. 여느 꽃처럼 며칠 동안 혹은 하루 종일 꽃을 피우고 있지는 않는다. 불과 1시간 가웃 꽃을 피고 지는 벼, 우리가 보는 것은 꽃이 진 후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이미 꽃밥이 터지고 암술머리에 꽃가루받이가 된 후 후줄근한 꽃가루주머니를 보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은 이글거리는 잉걸불이 아닌 사그라지는 불씨다. 


벼는 아침 10시 즈음에 1시간 정도 잠깐 왕겨를 열고 암술과 수술을 살짝 내밀었다가 자기들끼리 짝짜꿍이 한 후에 왕겨를 닫아버리는, 그래서 다른 꽃의 암술과 수술이 만나 수분을 하는 딴꽃가루받이가 아닌 같은 꽃의 암술과 수술이 꽃가루받이를 하는 제꽃가루받이 식물이다. 그러므로 벼꽃을 보려면 아침에 들녘으로 나서야 한다. 비록 꽃 같잖은 꽃이지만 그 꽃에서 식량인 쌀알이 만들어진다. 


 초록의 벼는 초록으로 푸르지만 그대로 싱싱함을 자랑함에 머물지 않고 주황으로 변하면서 알곡을 영그는 알찬 곡식이다. 가을의 황금들녘은 봄여름의 초록 벼가 꿈꾸던 풍경이다.  



10. 알알이 여문 벼알



여름 지나고 가을 오면 사춘기를 보낸 벼는 어른이 된다.
꽃가루와 암술머리가 만나 가루받이를 하고 이어서 정핵과 난핵이 만나 정받이가 이뤄지면 왕겨 안에서 쌀이 자라는데, 쌀을 품은 벼알은 유숙기(벼 따위의 곡류가 성숙하는 과정의 초기 단계)와 호숙기(낟알이 채 여물지 않아 내용물이 아직 된풀 모양인 시기)를 거쳐 완숙기(완전히 익는 시기)에 이른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알알이 여문 벼알은 점점 무게를 더해가며 고개를 숙인다. 푸른 기운이 가시고 누런 빛깔로 변하면서 알찬 벼알은 나날이 튼실해진다.


벼알이 여무는 등숙기의 기상상태는 매우 중요하다. 여뭄 초기에는 일사량이 강하면서 비교적 고온이 등숙에 유리하고, 여뭄 후기에는 고온이 필요 없고 저온이 동화물질 전류와 축적에 유리하다. 등숙기인 8월 하순~9월 중의 벼 여뭄에 적정한 온도는 20~22℃인데, 이천시의 평균기온은 20.4℃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이 벌고 적게 써야 하듯이, 벼알이 알차게 여물려면 양분을 많이 만들고 소비는 적게 해야 한다. 식물은 빛과 온도의 영향을 받아 양분을 벌기도 하지만 호흡을 통해 양분을 쓰기도 한다. 낮에는 빛이 있어서 양분은 많이 만들고 소비는 적게 하지만, 밤에는 빛이 없기에 생산은 없고 소비만 있게 된다. 밤온도가 높으면 그만큼 낮에 저축한 양분을 소진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뭄시기에는 밤과 낮의 일교차가 10℃ 정도 크게 나는 게 좋다. 이천의 경우 9월 평균 일교차는 11.1℃(최고 25.6 ↔최저 14.5)다.


벼 베는 시기는 이삭 팬 이후의 적산온도가 1,100℃ 일 때가 적기인데, 중만생종은 이삭 팬 후 50~55일 경이다. 이천지역에서 8월 15일경에 이삭이 패므로 10월 7일 경이 추수할 때다.

수확시기가 빨라지면 청미(덜 여물어 푸른 빛깔을 띤 쌀알)와 미숙립이 많아지고 수분함량이 높아져서 싸라기가 많아진다. 수확시기가 늦어지면 쌀겨층이 두꺼워지고 빛깔이 나빠지며 미질이 떨어지고 금 간 쌀이 많이 생긴다. 

예전에는 낫으로 벼를 베어서 말리고 탈곡기로 벼알을 털어낸 후 자루에 담았으므로 이 작업에 수일이 걸렸는데, 요즘엔 콤바인으로 논에서 벼를 베면서 바로 벼알을 훑고, 볏짚은 갈아서 논에 까는 것을 한번에 한다.


벼 품종비교와 병해충 관찰을 위해 관리하는 예찰논의 벼를 일부 낫으로 베어내어 내년에 품종으로 사용할 것을 따로 저장했다.


벼가 익어가는 논에는 메뚜기가 한철이다. 알알이 여문 벼알에 매달려서 사랑을 나눈다. 이 모습을 언뜻 보면 아기 메뚜기가 엄마 메뚜기에게 업힌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암컷 메뚜기 등을 올라탄 수컷 메뚜기이다. 예전에 메뚜기는 벼의 해충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친환경 이미지로 더 도드라진다.


이제 거진 수확을 마친 들녘은 고즈넉하다. 이 들을 바라보는 농부의 맘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낸 부모의 맘처럼 뿌듯함과 허전함이 엇갈린다.



올해는 농사하기 참으로 어려운 기상환경이었다. 봄의 저온, 여름의 일조 부족, 가을의 태풍. 특히, 초가을에 찾아온 태풍에 많은 벼들이 쓰러져서 예년에 비해 수확량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잘 자라 준 벼가 고맙고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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