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스, 양팔저울, 이불, 페인트
논흙을 써레로 바수고 번지로 매무시한 농부는 지하수를 퍼서 논물을 자박하게 댔다. 마구 헤집어진 논은 흙탕물로 흐릿한데 오후 봄바람은 논물을 연신 집적거린다. 물낯을 스치는 바람 탓에 조리로 돌 이듯 출렁이던 흙탕물, 이삼일이 지나니 흙탕은 녹말처럼 앙금 져 바닥에 깔리고 맑은 물이 잔잔하다.
농부는 모내기를 위해 논물을 찔끔 남기고 바닥이 듬성듬성 드러나도록 물을 뺐다. 진흙이 곰보빵 거죽처럼 드문드문 드러난 논에 모판 실은 이앙기가 첨벙첨벙 굴러가며 모를 심었다. 이앙기 지나간 자리엔 여섯 줄 모가 공수부대원이 비행기에서 점프하듯 바닥에 내리 꽂혔다. 어느덧 논바닥은 병사들이 도열한 연병장처럼 모가 줄지어 자리했다.
그 자리는 어린모가 벼 포기로 자랄 새로운 터전이다. 달포 전, 세로 한 자 가로 두 자 크기의 모판에 뿌려졌던 볍씨는 못자리에서 어린모로 자랐고, 이제 논으로 자리를 옮겨 아주 심긴 것이다. 지상에 내려온 공수부대원이 숨 돌릴 겨를 없이 진지를 구축하듯 논바닥에 꽂힌 모는 재빨리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는다. 제 때 자리 잡지 못하면 그 자리는 못자리가 아닌 묫자리가 될 수 있다.
모를 심기 위해 물을 뗐던 농부는 모내기 후 다시 물을 흥건하게 댔다. 모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해 자리를 채 잡지 못했건만 농부는 머뭇 없이 물을 펐다. 차오르는 논물에 갓 심긴 모는 줄기가 잠기고 잎도 하나둘 잠겼다. 논물이 모 키의 가슴께 이르자 농부는 물 푸기를 그쳤다. 모낸 후 한 주간은 논물을 깊게 대야 한다.
그렇게 논물을 깊게 댄 채로 일주일을 보냈다. 이 때는 새 뿌리가 논바닥에 내리며 자리를 잡아가는 활착기다. 활착기에 논물을 모의 가슴 높이만큼 깊게 대는 까닭은 벼가 새로운 공간에서 자리를 잘 잡도록 거드는 배려다. 군대에서 신병이 자대에 배치되면 일주일 정도는 아무 일도 시키지 않고 선임도 간섭하지 않는데 이는 낯선 환경에 잘 적응토록 배려하는 거다. 모를 심고 나서 물을 깊게 대는 것은 이런 돌봄이다. 따가운 햇볕과 흔들어대는 바람, 쌀쌀한 추위와 경쟁자인 잡초로부터 벼를 지키려는 농부의 보살핌이다. 모낸 후 깊게 대는 논물은 깁스요, 양팔저울이요, 이불이요, 페인트다.
깁스는 뼈가 금 갔거나 부러졌을 경우 아물 때까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지지대다. 뼈가 절단된 경우 그곳에서는 새로운 뼈 생성물질이 나와서 굳어지는데 완전히 아물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게 해야 회복이 빠르다. 팔이 부러진 경우 팔 바깥을 깁스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데, 논물은 이 깁스처럼 벼의 흔들림을 줄인다.
모를 논으로 옮겨 심으면 새 뿌리가 나와서 논바닥에 자리를 잡는다. 금 간 뼈에서 새로운 물질이 나와서 붙듯이 말이다. 그런데 봄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모가 미처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바람에 흔들리면 자리 잡기가 더디다. 뼈가 절단된 상태에서 자꾸 움직이면 뼈 붙기가 더디듯이.
모가 물에 깊이 잠기면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다. 물은 공기보다 밀도가 높아 모의 흔들림을 줄인다. 나무를 옮겨심기한 후에는 흔들리지 않도록 나무줄기에 지지대를 대주듯이, 뼈가 부러지면 움직이지 않도록 깁스를 해준다. 모낸 후 깊은 논물은 벼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깁스다.
양팔저울은 두 물건의 무게가 같은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균형이 필요할 때 양팔저울을 사용한다. 보통 저울은 어떤 물건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잰다. 묵직한 것에 가치를 두며 무거운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양팔저울은 한쪽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를 가늠하기보다는 두 쪽의 무게가 같아지도록 견주는 저울이다. 양쪽 접시에 물건을 올릴 때 한쪽으로 치우치면 다른 쪽에 무게를 보태서 균형을 맞춘다. 포도나무 노균병을 예방하기 위해 사용하는 석회보르도액은 황산구리와 생석회를 섞어서 만드는데 4-4식 보르도액을 만들 경우 물 1L에 황산구리 1g과 생석회 1g을 섞는다. 구리와 석회의 무게가 같게 맞추기 위해 양팔저울을 사용한다.
사람은 두 다리의 길이가 같아야 올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키 클 욕심에 한쪽 다리만이라도 우선 키운다면 그의 걸음걸이는 절름발이가 된다. 키가 좀 작더라도 두 다리의 길이가 같아야 균형 잡힌 걸음을 걸을 수 있다.
집으로 들어오는 상수도의 수량과 집에서 나가는 하수도의 수량은 같기에 하수도 계량기를 따로 두지 않고도 상수도 계량기를 통해 하수도 요금을 물릴 수 있다. 식물은 뿌리에서 물을 흡수하고 잎에서 수분을 증산한다. 이 과정을 통해 빛과 이산화탄소를 이용하여 양분을 만든다. 대체로 잎에서 증산한 물의 양은 뿌리에서 흡수한 물의 양과 비슷하다. 뿌리는 부실한데 잎만 무성한 나무는 작은 가뭄에도 금방 시든다. 조경업자가 나무를 옮겨심기할 때는 심하게 가지치기를 한다. 아무리 분을 잘 떠도 뿌리의 상당량은 잘릴 것이니 그만큼의 줄기도 쳐내서 뿌리와 줄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다.
모내기의 상황은 나무를 옮겨심기와 같다. 모를 옮기며 뿌리 일부는 잘렸고 모낸 후 아직 새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상태라서 뿌리에서 물을 흡수하는 능력이 적다. 잎은 그대로라서 뿌리에 비해 증산 기능은 줄지 않았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모의 잎을 잘라낼 순 없다. 이때 물을 깊게 대어 물 밖으로 나온 잎의 면적을 줄이면 잎의 수분 소모를 낮출 수 있다. 모낸 후 물을 깊게 대는 것은 뿌리의 흡수량과 잎의 증산량의 균형을 맞추는 양팔저울이다.
밤에 잘 때 추위를 막기 위해 이불을 덮는다. 이불을 덮으면 따뜻하다. 이불은 포근하다. 이불은 겨울밤에만 덮는 것이 아니다. 봄엔 낮은 포근하더라도 밤은 여전히 쌀쌀하다. 그러므로 따사로운 봄날에도 밤에 잘 때는 이불을 덮는다. 모낸 후 농부가 어린모 목까지 차도록 물을 깊게 대주는 것은 엄마가 아이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물은 이불이다. 물은 공기보다 비열이 높다. 비열이란 물질 1g의 온도를 1℃ 올리는데 필요한 열량(cal)인데, 물은 비열이 1칼로리인 반면에 공기는 0.24칼로리다. 이 말은 공기가 물보다 빨리 데워지고 반면에 빨리 식는다는 뜻이다.
중부지방에서는 5월 중순에 모내기를 하는데 이때 한낮의 최고기온은 23℃ 이상으로 오르지만 한밤의 최저기온은 13℃ 이하로 떨어져서 일교차가 10℃ 이상이 난다. 이 기온에 따라 논물의 수온도 오르내리지만 기온처럼 변화가 크지는 않다. 비열이 낮은 공기는 양은냄비처럼 금방 달궈졌다 금방 식지만 비열이 높은 물은 가마솥처럼 서서히 데워졌다가 서서히 식는다.
낮에는 기온이 수온보다 높지만 밤에는 기온이 수온보다 더 낮다. 즉 밤에는 물 밖보다 물속이 덜 춥다. 모가 물에 더 깊이 잠길수록 이불을 위로 당겨 덮듯이 추위를 이길 수 있다. 모낸 후 깊게 댄 논물은 모를 보온하는 포근한 이불이다.
철문을 단 후 페인트를 칠한다. 페인트를 칠하면 철문이 오래간다. 페인트를 칠하는 이유는 색을 입혀서 예쁘게 보이는 장식 효과도 있지만 녹스는 것을 막는 기능도 있다. 철에 페인트를 칠하면 산소가 철에 직접 닿는 것을 막아서 녹을 방지 한다. 산소는 동물에게는 숨 쉬는 데 필요한 이로운 기체지만 철에게는 녹을 슬게 하는 해로운 독가스다.
강함의 대명사인 쇠도 산소 앞에선 뙤약볕 아래의 어름조각이다. 그러므로 산소가 쇠에 닿지 않도록 페인트를 칠해서 막아야 한다. 철문을 달고 그대로 두면 얼마 못 가 검붉은 녹물이 온통 철문을 뒤덮을 것이다. 논도 마찬가지다. 논에 모를 심고 물을 담그지 않고 그대로 두면 얼마 못 가 잡초가 무성한 피논이 될 것이다.
논에 모를 심고 물을 대면 잡초가 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철문에 페인트를 칠해서 산소를 차단하듯 논에 물을 대서 산소를 차단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논풀은 물에 잠기면 싹이 트지 못한다. 물로 인해 공기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이는 불났을 때 이불을 덮어서 공기를 차단해 불을 끄는 것과 같다.
논 잡초는 물만 깊게 유지하면 거의 문제없다. 대표적인 논잡초인 피는 논물을 3cm 깊이로만 대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모를 심은 후 논물을 깊게 대는 것은 철물에 페인트를 칠해서 산소를 차단해 녹이 못 슬게 하듯이 논바닥에 산소를 차단하여 잡초가 나지 못하게 한다. 모낸 후 논물을 깊게 대는 것은 산소 공급을 차단하는 페인트 칠이다.
모낸 후 일주일 가량은 물을 깊게 대지만 언제까지나 물을 깊게 대는 것은 아니다. 모가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잘 잡은 후에는 논물을 얕게 대는 것이 좋다. 벼는 뿌리 부근의 각 마디에서 새 줄기가 나오면서 포기가 버는데, 논물을 얕게 대면 한낮의 햇볕에 물이 데워져서 포기가 잘 번다. 그러므로 모가 새 뿌리를 내린 후 새 줄기를 낸 때는 논물을 얕게 대야 한다. 이때는 모내기 후 열흘 지나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