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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Jul 04. 2020

평평한 논

평등


논은 평평하다. 논바닥은 평평해야 한다. 논바닥이 평평해야 하는 이유는 물을 담기 때문이다. 단순히 물만 담는 것이 아니라 물을 담은 논에 벼를 심는다. 벼는 평평한 논에서 잘 자란다. 


논과 저수지는 둘 다 물은 담고 있지만 그 까닭은 서로 다르다. 저수지는 많은 물을 가두어야 하기에 깊을수록 좋다. 그러므로 저수지의 바닥은 선사시대 빗살무늬토기처럼 가운데로 갈수록 깊다. 하지만 논은 물을 담되 고르게 담아야 하므로 논바닥은 전체가 쟁반처럼 평평하다. 논은 바닥이 고른 작은 저수지다. 


논이나 저수지나 물낯은 반반하다. 수면이 고른 이유는 공기가 중력의 힘으로 수면을 미장하기 때문이다. 물은 어디에 놓이든 저절로 평평해진다. 맨 위의 물낯은 항상 그렇다. 구름에서 비가 내리고,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고, 계곡물이 강으로 흘러 바다로 향하듯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모인다. 그리하여 바다에 모인 물은 번지질한 논처럼 두루 번지며 펴진다. 


물 윗면이 평평하다고 해서 바닥면까지 평평한 건 아니다. 물의 윗면은 중력에 의해 퍼지지만 물의 아랫면은 그 물을 담은 틀의 모양대로 깊어진다. 마치 석고 반죽을 틀에 부었을 때 윗면은 평평하지만 아랫면은 형틀대로 굳는 것과 같다. 바닷물의 깊이는 산을 엎어놓은 듯 앞바다에게 난바다로 나갈수록 두꺼워지지만 논물의 깊이는 논두렁에서 안으로 들어가도 시루떡처럼 고르다. 


논물의 깊이는 일정하다. 그래야 한다. 논에서는 벼를 재배하기 때문이다. 일반 수영장의 깊이는 위치에 따라서 각각 다르다. 입구 쪽은 아이들도 놀 수 있을 정도로 얕더라도, 중간께 들어가면 어른 가슴 높이에 이르고, 더 안으로 들어가면 어른도 잠길 정도로 깊다. 



어린이수영장은 그 깊이가 얕으며 전체가 같다. 아이의 목이 잠기는 깊이여서는 안 된다. 어린이수영장 안에서는 어디서든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바닥 전체가 얕아야 한다. 그렇다고 발목만 잠길 정도로 얕으면 아이들은 흥미를 잃을 것이다. 배꼽 정도 잠길 깊이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할 것이다. 


논은 유아전용 풀장과 같다. 얕으면서도 전체의 깊이가 같다. 모내기 때 논에 심기는 모는 아이 같은 어린모다. 못자리에서 싹튼 볍씨는 한잎 두잎 잎을 내며 자라는데, 잎 수에 따라 모의 나이를 센다. 첫 번째 잎이 나오면 1엽기, 두 번째 잎이 나오면 2엽기, 세 번째 잎이 나오면 3엽기다. 못자리가 유치원이라면 논은 학교다. 모의 나이가 7~8엽기가 되면 못자리를 떠나 논으로 자리를 옮긴다. 유치원생이 예닐곱 살이 되면 초등학교에 가는 것과 같다. 



논은 모를 받기 위해 진작부터 채비를 했다. 쟁기질을 하고 써레질을 한 후 번지질까지 하여 논바닥을 고르게 한 후 물을 대고 모 맞을 준비를 마쳤다. 모내기 날, 드디어 어린모들이 논에 들어와 각자 줄지어 자리했다. 모가 자기 자리를 잘 잡도록 논은 물을 빼고 논바닥을 곤죽처럼 질펀하게 했다. 어린모가 자기의 자리를 잡은 후 논에 물을 댄다. 어린모는 아이들처럼 물을 좋아한다. 논은 어린이수영장처럼 물이 찰랑찰랑 찼다. 


모가 물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 전체가 잠길 정도로 깊게 대면 안 된다. 모 키의 2/3 정도 깊이가 좋다. 아이들이 가슴 높이의 물에서 재밌게 놀 듯, 어린모도 가슴 깊이로 논물을 대주는 것이 좋다. 예닐곱 살 아이들의 키가 고만고만하듯 어린모의 키도 끼리끼리 비슷하다. 


논바닥이 어린이수영장 바닥처럼 고르다면 논물의 깊이는 전체가 같으므로 모는 같은 깊이로 잠길 것이다. 만약 논바닥이 고르지 않다면 모는 어떻게 될까? 깊은 곳에 심긴 모는 온몸이 물에 잠길 것이고, 얕은 곳에 심긴 모는 물이 잠기지 않아 외딴섬의 나무처럼 물 밖으로 드러날 것이다. 둘 다 살기 힘든 상황이다. 잎 끝까지 온통 잠긴 모는 호흡을 하지 못해 물에 빠져 죽고, 물 밖으로 흙이 드러난 곳에 심긴 모는 바람과 햇빛에 수분을 빼앗겨 탈수 증상을 보이며 말라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벼를 잘 기르려면 모가 일정한 깊이로 물에 잠기도록 논바닥을 고르게 해야 한다. 


모판의 모는 평등하게 싹이 터서 평등하게 자란다. 땅거죽을 비집고 일제히 올라오는 볍씨의 새싹은 까까머리처럼 촘촘하고 깔끔하다. 고루고루 빛을 받고 물을 받아 똑같은 키로 고르게 자라서 똑같은 날에 논에 심긴다. 평등한 세상을 보고 싶으면 논으로 와서 벼를 보면 된다. 논은 평평하고, 벼는 평등하며, 그 풍경은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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