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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Jul 13. 2020

재배자가 지배자일까?

벼가 말하길

농사꾼은 우리를 재배한다. 농부의 돌봄으로 우리 벼가 자라며, 그들의 챙김으로 볍씨가 간수된다. 우리가 해 거듭거듭 싹트고 씨 맺는 것은 농사꾼이 우릴 뿌리고 기르고 거둔 덕분이다.      


우리 사는 자연은 쉴 새 없이 다투는 싸움판이다. 식물끼리는 너도나도 빛과 물을 차지하려 아등바등 나서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처음 뒤처지면 끝내 사그라들기 때문이다. 용케 빛 잘 들고 거름진 데 자리매김했더라도 한숨 돌릴 겨를 없이 동물로부터 자기 몸을 지켜내야 한다. 애벌레는 잎을 갉아먹고 초식동물은 줄기를 뜯어먹는다. 째깐한 균과의 싸움도 솔찬히 성가시다. 곰팡이는 틈틈이 식물체를 파고들어 병나게 한다. 자연에서 살아남기란 하루하루 안녕 안부다. 식물은 씨를 맺기까지 어떡하든 살아남아 버텨야 한다.     


식물은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애면글면 애쓴다. 그것은 싹틀 때부터 떠안은 숙제인데 나름의 방법대로 씨를 퍼뜨린다. 민들레는 갓씨의 솜털을 부풀려서 바람에 실어 날리고 열대지방의 바닷가 야자는 열매를 물에 띄워 멀리 보낸다. 제비꽃은 개미에게 삯을 주고 씨앗의 이동을 맡긴다. 개미는 단것을 아주 좋아하는데, 제비꽃 씨앗에는 당분 덩어리인 엘라이오좀이 붙어있다. 개미는 제비꽃 씨앗을 옮겨주는 대가로 달달한 엘라이오좀을 챙긴다.  주목이나 겨우살이는 일부러 새에게 먹혀서 제 씨앗을 멀리 퍼뜨린다. 새는 씨앗을 감싼 과육을 먹고 어딘가로 이동하여 똥을 싸는데 이때 소화되지 않은 씨가 똥과 함께 배출되어 결과적으로 주목과 겨우살이를 퍼뜨리는 셈이다. 씨앗이 자라서 다시 씨앗을 맺는 것은 백의 하나 천의 하나 만의 하나다. 만만찮은 희생이요 막막한 바람이다. 하지만 이 만의 하나는 다시 백이 되고 천이 되고 만이 된다.     


우리 벼는 누리 골골샅샅에 뿌리를 내렸다. 이는 모든 풀들이 바라는 바다. 우린 어느 푸나무보다 씨 퍼뜨리기에 성공했다. 남한의 농경지는 158만 ha인데, 이중 밭이 75만 ha이고 논이 83만 ha로서 밭보다 논이 더 넓다. 밭에는 온갖 작물이 심긴다. 오로지 한 작물만을 심을 수만은 없는 형편이다. 밭에 옥수수도 심고 콩도 심고 감자도 심는다. 얼마나 많은 작물이 밭에 심기는지 모른다. 하지만 논은 다르다. 애오라지 벼만 심는다. 벼 전용 풀장이다. 논은 밭보다도 넓은데, 이 논을 벼가 독차지한다. 작은방에 여럿 사는 게 밭작물이라면 큰방에 홀로 지내는 게 우리 벼다. 우리는 뭇 풀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잘 나간다.     


어떤 풀은 말한다. 그건 우리가 인간에게 붙잡혀서 노예처럼 지배당한 신세라고! 과연 우리는 농부의 포로일까? 벼를 재배하는 농부는 우리 벼를 지배하는 걸까?

아니, 아니다. 인간이 벼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벼도 인간을 이용한다. 우리는 인간을 부려서 벼의 바라는 바를 이루었다. 인간이 인간 뜻대로 벼를 재배하지만 결과적으로 벼도 벼 뜻을 이뤘다. 서로 비긴 셈이다.     

벼는 농부가 좋아할 만한 매력을 가졌고, 농부는 이 매력에 끌렸다. 남자들이 예쁜 여자에게 홀딱 홀리듯 농부는 벼에게 폭 반했다. 우리는 작물의 특성을 잘 가지고 있다. 벼는 맛 좋고 영양 높다. 수량이 많고 잘 여물며, 쑥쑥 자라고 알뜰하게 거두어진다. 오래 보관도 된다.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다. 농부가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벼를 작물로 택했지만, 택하도록 이끈 것은 우리가 가진 매력이다. 우린 씨를 퍼뜨리려고 인간 손을 빌렸다. 물론 인간은 우릴 통해 식량을 얻는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니 서로 손잡기를 마다할 까닭 없잖은가!     


벼를 재배하는 농부 중에는 우리 벼를 자기들이 지배한다고 여기는 이도 있다. 자기들 덕에 벼가 무탈하게 자라는 거라며 생색내기도 한다. 인정하지만 한편으론 벼가 인간에게 맞춘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바라는 바를 맞춰주지 않았다면 인간은 우릴 작물로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다른 풀들은 인간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못해서 잡초로 취급되고, 벼와 몇몇 풀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었기에 작물로 인정받아 재배되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은 엄청 발전했다. 하지만 식량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발전은 없었을 거다. 먹고사는 게 여유로우니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고, 이 곁눈질을 통해 예술을 비롯한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다. 인간의 주식은 쌀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밥줄이다. 인간이 벼를 만난 것은 길 가다가 보석 주운 행운이다.      


재배자는 필요한 먹거리를 얻기 위해 작물을 돌봄으로써 품삯을 받는 일꾼이다. 작물이 잘 자라주면 재배자는 수확물을 많이 얻고 그렇지 않으면 적게 얻는다. 재배자가 작물에게 거름 주고 물 주고 북 주지만 사실 재배자가 하는 일이란 게 호텔보이처럼 단순한 돌봄이다. 그저 돌아가는 회전문을 살짝 미는 것뿐이다. 작물은 재배자의 도움이 없어도 자신이 가진 생명력으로도 스스로 자랄 수 있다.

작물을 비롯한 식물은 영양 차원에서 독립적이다. 흙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물과 빛과 공기만 있으면 스스로 필요한 양분을 만들 수 있는 독립영양생물이다. 반면에 인간을 비롯한 동물은 종속영양생물이다. 우리 식물이 만든 것을 얻지 못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우리 식물을 직접 뜯어먹는 초식동물이든 또는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육식동물이든, 동물은 식물로부터 양분을 빌어먹는 의존적 존재일 뿐이다. 인간이 식물을 작물로 재배하는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지배하는 것으로 비치지만 실은 인간이 작물에게 양분을 구걸하는 꼴이다. 식물은 동물 없이도 살 수 있지만, 동물은 식물 없이는 살 수 없다.      


작물은 모두 특기를 하나둘 지녔다. 참깨로는 참기름을 짤 수 있고, 콩으로는 두부를 만들 수 있으며, 고추로는 양념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벼로는 밥을 지을 수 있다. 밥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음식이다. 그러기에 벼를 재배하는 농부는 벼를 애지중지 보존하며 특기를 더 개발토록 꼬드겼다. 그래서 벼는 숨은 특기들을 하나둘 꺼내 지금의 찰지고 밥맛 좋으며 영양가도 높은 쌀로 거듭났다.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반려동물로 개와 고양이가 있는데, 우리 벼가 둘 중 하나라면 우린 고양이다. 애묘인이 고양이를 치다꺼리하는 집사이듯 농부는 벼를 애지중지 돌보는 일꾼이다. 가을걷이에 삯으로 나락을 주기로 하고 우리는 안마받듯이 그저 몸을 농부에게 맡기면 된다. 재배는 작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작물을 섬기는 것이다. 농부는 우리를 지극히 보살핀다. 우리 벼는 팔방미인처럼 매력만점이다. 끌림 있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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