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버른앨리스 Oct 14. 2018

서른 언저리의 이민


혹시 네가 서른 언저리의 내 또래라면, 

한국에 힘들게 쌓아놓은 것이 있는 나이라면, 어마어마한 학비와 시간을 들여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에도 익숙해졌다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너는 정말 외롭고 걱정스러울 거야. 네 맘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느껴질지도 몰라. 아무것도 모를 때 워홀이나 갈까, 하고 왔다가 돌아가기 싫다, 조금만 더 있어보자 하는 식으로 얼렁뚱땅 이민 온 나 같은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이 갈등하고 있겠지. 지루할 정도로 긴 고민의 시간을 거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한국에 엄청 친한 친구들은 몇 명 없지만, 국토대장정이나 다양한 알바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그리고 얼떨결에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이민에 대한 고민을 상담해줬어. 덕분에 다양한 직 업을 가진, 이민을 생각하는 20~30대들의 이야기를 많이 접할 수 있었어. 그러면서 나도 나만의 이민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나이를 가진 사람들의 이민 전체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더라. 듣다 보니 많이 궁금해지고, 많이 공감하게 됐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해. 


다 버리고 새 판을 다시 짜기는 어정쩡하고, 

그렇다고 지금 하던 대로 쭉 살아가고 싶지는 않은. 

서른 언저리 어디쯤, 너이기도, 나이기도 한 우리의 이야기야. 





옛날과 비교해보면, 사람들이 이민을 대하는 태도는 참 많이 달라졌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나 싶어. 내가 떠나기 전만 해도,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간다고 하는 말은 듣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거든.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이 조국이, 자랑스러운 나라 대한민국이 싫다니? 건방지고 재수 없고 유별나다는 소리를 들을 법한 소리였지. 나라가 있으니까 네가 있는 거란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어. 


8년 전만 해도 퇴사나 이직이란 말은 금기어에 가까웠는걸. 모두들 머릿속으로 생각은 하지만, 대놓고 나 퇴사할 거다, 이직할 거다 말 하는 건 힘들었지. 요새는 다르더라. 서른 언저리의 세대들이 사회 초년생을 겨우 벗어나는 지금은, 내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내 거취를 찾아보는 일, 이를테면 퇴사, 이직, 해외취업 같은 것들에 대 해 훨씬 개방적인 것 같아. 

그렇지만 이민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조금 조심스럽잖아. 아무리 이민이 불안한 한국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처럼 여겨지더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더라도, 아직 사람들은 가까운 이의 이민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워. 내 형제자매가, 내 연인이, 내 딸, 아들이 이민을 간다고 할 때 그래, 잘 생각했다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더라. 게다가 무엇이든 시도해볼 수 있는 20대 초반 청춘도 아니고, 힘들게 졸업해서 취업이라는 바늘귀를 뚫고 자리 잡은 내 또래의 친구들이 이민을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들이 반기셨다는 소리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어. 



힘들어도 조금만 버텨라, 다들 그러고 산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내 나라만한 곳은 없다. 
돈 조금만 있으면 한국이 제일 살기 좋은 나라다.
직장에서 더 자리 잡고 돈 좀 모으면 괜찮을 거다. 



미친놈 취급받으며 부모님께 실컷 한 소리를 듣고 난 날이면, 친구들은 나에게 푸념하며 자꾸 시곗바늘을 돌리곤 해. 그때 너 워홀 간다고 할 때 따라갈 걸, 여기서 취업하지 말고 해외 취업 알아볼 걸, 과거로 과거로, 하나마나한 소리만 하는 거야. 너무 답답하니까.


그래도 직업이 이민에 도움이 되는 경우라면 그나마 나아. 토목, 건 축, 디자인, 요리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있으면 행운이지. 경력 따로 쌓을 것 없이, 지금 밥벌이하는 지식과 기술을 써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하지만 이민과 전혀 상관없는 전공과 직업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친구들은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어. 한국에서는 나를 당당한 사회인으로 만들어주지만 이민 가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경력과 직업. 그리고 그걸 얻기 위해 투자했던 너무나 많은 시간과 돈. 그걸 어떻게 쉽게 버릴 수 있겠어. 한때는 그게 꿈인 줄 알고 살았던 시절도 있었을 텐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았다는 징표인 명함, 나를 사회라는 지도 위에 올려놓는 지표들. 그걸 버리고 아예 다른 곳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한다는 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두려운 일일 거야. 내가 요리사, 레스토랑 오너로서의 날 포기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겠지. 


나에게 이민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 50명이 넘는 지인들 중, 이민이라는 큰일을 마침내 감행한 사람은 다섯 명 정도였어. 그중 한 명 은 시도를 해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갔지. 서른 언저리의 이민은, 결코 쉽게 시도해볼 수 있는 일은 아니야. 


이민을 할까 말까, 해야 돼, 말아야 돼. 내게 묻는다기보다 사실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었을 그 질문들에, 난 어떤 식으로든 확답을 할 순 없었어. 취업하지 않은 20대 동생들에게 “이왕 취업할 거, 먼저 해외 취업 할 수 있을지 알아봐”라고 조언할 순 있어도, 어엿한 직장인인 30대의 친구들에게 이민 오라고 들쑤실 수는 없는 일이더라고. 얼마나 고생해서 그 치열한 한국에서 자리 잡았는지 뻔히 아니 까, 섣불리 훈수를 둘 수는 없는 거야. 


다만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들은, 지금이 늦은 건지 아닌 건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거, 너무 늦었다고만 생각하지는 말라는 빤한 이 야기야. 30대인 우리가 술자리에서 찌질하게 하는 말들 있잖아, 술자리 단골 소재들. 그땐, 그땐 그랬었는데. 이렇게 적성에 안 맞는 줄 알았으면 전과할 걸, 그때 재수해서 가고 싶은 대학, 학과에 갈 걸, 빨리 자격증 준비할 걸, 이직할 걸…….


그때 했다면, 설사 실패했더라도 바로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그때의 내가, 그때 말이야, 그때는 늦지 않았었는데. 


40대가 된 친구가 다시 또 이런 이야기를 반복할까 봐 걱정스러워. 

그때, 서른 몇 살 때 내가 이민 가고 싶어 했을 때 있잖아, 그때 갔었어야 했어, 그때는 지금에 비하면 훨씬 자유로웠는데, 그때는 새로 시작하기에 그렇게 늦은 나이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씁쓸하게 웃을 누군가를 상상하면 마음이 좀 아려. 살면서 후회를 하지 않을 순 없는 거지만, 우리는 최대한 후회 없이 살려고 노력해야 하 는 거잖아. 


내가 해줄 수 있는 다른 이야기는, 사람마다 잘 맞는 시기가 있더라는 거야. 일찍 온다고 무조건 유리한 건 아니란 뜻이지. 나는 스물 여섯 살에 호주에 왔어. 이민을 생각하고 나서는 아예 스무 살 때, 아니면 고등학생 때 왔으면 좋았겠다고 후회했지만,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더라. 나는 나에게 맞는 시기에 이민을 잘 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두어 살만 더 어린 나이에 왔더라면 아마 요리를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고, 노는 것과 게으름 피우는 걸 그렇게 좋아하던 내가 성실하게 일하고, 돈을 모으진 못했을 거야. 자유로운 해외생활에 취해서 매일 노는 데 정신 팔려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했겠지. 아직 어리니까. 스물다섯, 여섯이면, 일곱이면 아직은 한참 놀아도 될 나이라고 합리화하면서 말이야. 


아무래도 20대 때 오면 정확히 무얼 원하는지 몰라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고, 허투루 시간을 흘려 보내기도 해. 하지만 30대가 돼서 온 친구들은 그런 고민의 과정을 건너뛰고 수월하게 원하는 길을 걷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사람 인연도 언제 만나느냐에 따라 잘 풀리기도 하고, 잘 안 풀리기도 하잖아. 어릴 때 만난 연인에겐 배려 없이 내 의사만 밀고 나가다가 결국 안 좋게 헤어지기도 하고. 성숙한 마음으로 준비가 다 되었을 때 하는 이민이, 패기로 부딪치는 이민 보다 더 쉽고, 수월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정말 많아. 이민 후 적응하는 과정도 30대에 온 사람들은 달라. 자기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는 나이라서인지, 원하는 삶을 만들어나가는 속도가 정말 빠르더라. 시행착오를 이미 몇 번 겪고 난 나이니 작은 실패에는 타격도 잘 받지 않고 말이야. 훨씬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어. 




내 친구들의 가장 큰 걱정은 무엇보다, 이거였어. 

네 가장 큰 걱정도 이거 아닐까. 일단 한번 넘겨짚어 볼게.


만약 안 되면? 


만약 이민에 실패하거나, 생각했던 것과 다르거나, 적응을 못해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힘들게 모아놓은 돈도 꽤나 써야 할 테고, 몇 년을 허비하고 나면 한국에 돌아가 다시 시작하기에는 힘든 나이일 텐데, 만약 실패 하면 그때는 어쩌지. 무엇보다도 이런 생각이 너를 가로막을 거야. 이민을 고민하던 내 친구들을 철벽같이 가로막았던 것처럼. 


한번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친구에게는 내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아. 나도 사실 확신 없는 말투로 괜찮을 거란 말만 반복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현실은 현실이니까. 한국이 나이에 얼마나 얽매어 있는 사회인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잖아. 제 발로 이탈했다가 돌아온 사람을 은근슬쩍 다시 궤도에 끼워 넣어줄 만큼 너그럽지 않은 곳인 걸 나도 잘 아니까. 


그래도 하나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은 호주에서 이민을 준비하다 실패해 한국으로 돌아간 경우에도 생각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다는 거야. 저 무서운 예상처럼 한국 사회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경우는 거의 없어. 이곳에서 배운 영어와 넓어진 시야 덕에, 한국에서 금방 자리 잡고 잘 살더라고. 이민을 생각하고 왔다가 정말 실패하고 돌아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도 않기도 하고. 돌아간 고국에서도 전보다 씩씩하고 단단해진 모습으로, 떠나기 전보다 훨씬 삶에 만족하며 사는 경우가 많아. 


근본적인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무엇이든 도전을 해본 사람과 아닌 사람은, 확실히 다른 것 같더라. 


어쨌든 그 사람들은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거잖아. 

행동하는 사람은 일단 움직이고 도전하니까, 그것부터 달라. 


이민도 실패하고, 돌아가서도 다 실패해 폐인처럼 사는 사람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어. 사람은 생각보다 강한 존재야. 그러니까 실패하면 어쩌지, 하며 망설이는 건 아주 조금만 했으면 좋겠어. 모든 일이 네 맘대로 되기는 힘들지만, 일단 도전하기로 맘먹었다면 너를 움츠리게 하는 생각은 떨쳐내는 게 좋아. 널 움츠리게 하는 것 들은 네 생각 말고도 넘치도록 많을 테니까. 안 그래도 장애물이 많은 상황인데, 네 생각까지 장애물이 되도록 놔둘 필요는 없어. 그렇다면 정말 시작하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서른, 정말 쉽지 않은 나이야. 

이제야 인생 좀 알 것 같고, 내 역량과 성향도 어느 정도 파악되는 나이. 열심히 지금 자리까지 오긴 했는데, 앞으로 계속 이 길을 쭉 가야 할지,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어야 할지 고민되는 나이지. 그리고 여태까지 짜온 판을 엎고 새 판을 짤 수 있을 마지막 기회일 것도 같은 그런 나이 말이야. 


나도 사실 이민까지는 어떻게 왔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매일 고민이야. 자영업은 수입도 널뛰기잖아. 내 감각도 살아 있고, 체력도 받쳐줄 때까지만 하려면 그게 언제까지일까, 어떻게 해야 즐겁게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다른 커리어를 찾아야 하는 날이 올 텐데, 어떤 식으로 그걸 준비해야 할지 감조차 안 와. 비교적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이직이나 새로운 커리어를 쌓는 게 쉬운 나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민되는 건 어쩔 수 없어. 

나이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조차 이미 나이에 구애받고 있다는 증거겠지. 10대 때는 10대의 인생이 진짜인 것 같고, 나이 먹으면 안 될 것 같잖아. 20대 때는 서른 넘어가면 큰일 날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서른이 넘어 보니, 이것도 그럭저럭 재미있더라. 다른 매력이 있어. 나는 이전과 많이 변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엄청 똑똑해지거나 현명해진 것도 아니지만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래서 40대가 되면 사는 게 재미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도 예전처럼 자주는 안 들어. 그때는 그때의 내가 느낄 수 있는 다른 재미가 있겠지. 우리, 생각보다 오래 남았잖아. 진짜로 살아내야 할 날들이. 싫든 좋든 사십 몇, 오십 몇 하는 날들이 올 거야. 


그때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에게 “그때 그 선택을 해줘서 고마워”라 고 말할 수 있게 하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그때가 오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겠지.



PHOTO CREDIT (INSTAGRAM) 

@SBIN_



MY INSTAGRAM:  @ALICEINMELBOURNE 



https://brunch.co.kr/magazine/your-migrant


https://brunch.co.kr/magazine/bluemelbourne


이전 08화 이민형 워홀러에게 보내는 생활밀착형 조언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