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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버른앨리스 Sep 23. 2018

이민이었을까, 요리였을까?


뜬금없는 질문인데, 너는 제일 좋아하는 미드가 뭐야?

나는 〈그레이 아나토미〉 정말 좋아해. 워홀 할 때, 한참 일이 힘들면 14시간 후에는 집에 가서 〈그레이 아나토미〉 볼 수 있으니까 조금만 버티자면서 버티기도 했다니까. 그 미드에서 말이야, 남자주인공 중 한 명인 데릭 셰퍼드가 수술을 시작하기 전에 늘 하는 말이 있어. 그날의 수술을 이끄는 리더인 데릭은 수술대에 누워 있는 환자를 내려다봐. 그리고 이 환자를 함께 살려낼 간호팀, 마취의, 인턴, 동료 의사들을 쭉 돌아보며 꼭 이 문장으로 수술의 시작을 알려.


오늘은 참 좋은 날이다, 누군가를 살리기에.
It’s a beautiful day to save lives.


지금 들으면 좀 오글거리기도 하는데, 그래도 나는 이 대사가 좋더라. 저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내 리더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팀원의 입장에서, 한 팀을 이끄는 리더가 저런 말로 내 하루를 열어 준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내 일을 사랑하고, 내 하루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 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침에 죽을 둥 살 둥 출근해서 사무적으로 메스를 건네고, 그냥 밥벌이하려고 멀뚱히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거야.


어느 좋은 날에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

그 아름다운 사람들 사이의 나.

오늘은 그런 좋은 날이 되고

나는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거지. 저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요리를 하면서 만났던 첫 헤드셰프는 아미르라는 유대인 남자였어.

내가 요리를 처음으로 제대로 시작한 레스토랑이었는데, 도크랜드라는 예쁜 항구에 있는 레스토랑이었어. 나는 겨우 요리 실기 수업만 끝내고 호텔 인턴십을 막 마친 막내였고, 아미르는 150 킬로그램은 너끈히 넘을 것 같은 덩치에, 목소리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험상궂은 남자였어. 아미르는 첫날에 나한테 그러더라. 너는 절대 키친에서 못 살아남는다고.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너는 여기 있기엔 너무 약해.
This is not for you. Not strong enough, not tough enough.



그렇게 마구 소리를 지르는 거야. 눈물이 핑 도는데, 내가 거기서 울어버리면 그의 말을 증명하는 게 될까 봐 꾹 참았어. 아미르는 내 가 얼마나 버티나 보려고 매일같이 나를 괴롭혔어. 그리고 일 자체도 정말 힘들었지. 근무 시간도 길었고, 그 레스토랑에서 버티면 다른 레스토랑에서는 모셔간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근무 환경은 열악했어. 그 레스토랑에 여자라고는 나밖에 없었어. 체력이 약한 나는 가끔 눈앞이 노래질 정도로 힘들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나는 ‘진짜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어. 영주권 때문에 얼떨결에 정한 전공이었지만 앞으로 이 길을 걸어야겠다고, 꼭, 반드시 진짜 요리사가 되겠다고 말이야. 사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단 몇 마디의 말이었어.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인데, 그 거대한 남자 아미르가 우렁차게 외치던 몇 마디 짧은 말 덕분에 내 길에 대한 확신을 얻은 거야.



레스토랑이 예약으로 꽉 차 있는 날, 짧은 미팅을 마치고 모두들 각자 맡은 섹션이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는지 결연하게 확인해. 손님들에게 훤히 보이는 오픈 키친이니까, 앞치마나 유니폼이 더럽지 않은지 다시 한번 내 모습을 살펴보는 거지. 그렇게 서비스를 맞이 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점검하고는, 아미르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 치는 거야.


셰프들아, 쇼타임이야, 우리의 쇼, 너의 쇼야. 오늘 완벽하게 해보자.

오늘도 재미 좀 보자. 우린 최고의 팀이니까.

Alright, Chefs, The show is on. It's show time!

Let's have some fun tonight.


나는 저 말이 그렇게 좋은 거야. 저렇게 우렁차게 말하고 나면 거짓말처럼 힘이 났어. 내가 이 쇼의 주인공이 아닌 건 알아. 그렇지만, 제일 작고 어리바리한 막내 역할이지만 이건 내 쇼잖아. 내가 어떤 확실한 역할을 맡고 있잖아. 같이 재미도 보고, 같이 죽도록 힘들기도 하고. 내 존재감이 있는 쇼잖아. 내가 만든 음식을 먹어주는 사람들이 눈앞에 있고, 옆에서는 바텐더와 웨이트리스가 활기차게 움직이고, 살아 숨 쉬는 소리가 나. 그 오고 가는 음식들, 동료 셰프들이 내지르는 소리들. 그 안에서 나도 제대로 된 역할을 맡아서 신나게 움직이는 거야. 이 세상에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야. 내가 하는 일이, 확실하게 세상에 영향을 주고 있어




나처럼 단순한 사람들은

사무직처럼 큰 톱니바퀴 안에서 일하면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바로 보지 못하니까, 내 존재의 가치에 의문을 갖게 되는 것 같아. 그리고 한국에서는 언제나 말단 중의 말단이었고, 내가 하는 일들은 그야말로 정규직들의 보조였으니까 더 심했지.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고, 내가 하는 일들도 뭐, 사실 안 해도 그만, 누가 와서 해도 상관없는 그런 업무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매너리즘에 빠졌었어. 내 하루가, 내 삶의 하루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겠는거야.


내가 왜 사는 거지. 이 복잡한 톱니바퀴에서

나라는 작은 톱니는 빠져도 아무 상관이 없는데.


근데 이 요리, 레스토랑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단순하잖아. 그게 이 직업의 매력인 것 같아. 거칠고 단순해. 사회라는 게 생기면서 형성된 가장 단순한 원리의 상업이잖아. 사람들은 먹어야 하고, 음식을 만들어 팔고. 음식이 맛있으면 돈을 벌고. 이 바퀴가 어떻게 돌아가고, 내가 그중 무슨 역할을 하는지가 우스울 만큼 단순하게 보인단 말이야. 오늘 매출 얼마래, 오늘 우리 몇 테이블이 왔대, 우리 최고 매출 달성했대. 잘했어. 우리가 이런 가치를 함께 창출한 거야. 이런 피드백이 바로바로 오가는 게 레스토랑이야. 물론 안 좋은 피드백도 받지. 음식이 맛있다, 맛없다, 팁을 준다, 안 준다 그런 단순한 의사 표시와 피드백. 그렇게 가장 단순하게 돌아가는 구조가 나와 잘 맞았어.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 호주에 와서 식당에서 오랫동안 알바하며 주방장 오빠들이 하는 요리를 곁눈질로 배우다가,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지금 나의 레스토랑 두 개를 운영하기까지. 처음에는 요 리가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저 한국에 가기 싫어서였어. 한국에 가지 않으려면 기술 유학을 해야 하는데 다른 건 엄두가 안 나는 거야. 치기공이나 회계, 간호 같은 건 영어랑 머리가 안돼서 못 따라 갈 것 같고, 그나마 레스토랑 홀 매니저 경력이 꽤 있으니까 흉내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결정한 거거든.


정 영어가 안 되면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했어. 사실 화이트칼라에 대한 동경 때문에 정장 입고 회사 다니는, 그런 직업을 더 갖고 싶기도 했었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회계나 마케팅은 학비도 비싸고, 무엇보다도 영어가 자신이 없었으니까. 어차피 영어를 잘 못하니까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걸로 고르자는 마음으로 100퍼센트는커녕 1퍼센트의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고른 전공이었는데, 그게 내겐 흔히들 말하는 ‘천직’ 같은 거였나 봐.


극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난 요리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아마 살아가지 못할 만큼 추락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 우울함, 무력감, 자기혐오, 한국에 놓고 온 것에 대한 그리움, 고질적인 문제였던 자존감,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게 해일처럼 덮쳐와 숨도 쉴 수 없었을 때 요리라는 구원을 찾은 거야. 그때야 숨통이 트이더라. 질식 직전에, 기적처럼 제대로 숨 쉬는 법을 배웠어. 그때 만약 한국에 돌아가서 초라한 스펙으로 취업 준비를 했거나 공부도 못하는 내가 시험 준비를 했다면, 혹은 낯선 호주 땅에 떨어져서 안 그래도 불안한데,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울며 겨자 먹기로 했다면 나는 아주 불행했거나, 살고 싶지 않아 했거나, 내 옆의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었겠지.




아무리 초라해도 내 인생을 사는 게 나한테는 굉장히 중요했나봐. 많은 돈을 받으면서 다른 인생의 소품처럼 사는 것보다, 한 달에 고작 100만 원을 쓸지언정 내가 필요한 존재임을 느끼며 사는 게 내겐 중요했구나, 그걸 그때야 알았어. 나도 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니까 숨을 쉬는 것 같아졌어. 튼튼한 갑의 인생을 더욱 견고하게 받치려고 하루를 꼬박 고개 숙이며 보내는 을이 아니라, 나는 나대로 살 수 있게 되니까 그제야 숨을 쉬 는 것 같더라.


튼튼한 갑의 인생을 더욱 견고하게 떠받치는 을이 아니라, 나대로 내 인생을 살게 되니까 그제야 숨이 쉬어졌어.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한국이든, 호주든, 태국이든 물리적인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 같아. 내가 열심히 하면 무언가를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내 직업과 역할을 찾은 곳이 호주였기 때문에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된 것 같아. 만약 한국에서 찾았다면 한국이, 태국에서 찾았다면 태국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가끔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어.

깊은 어둠으로 끝없이 가라앉던 내게

결정적인 구원이 된 건 이민이었을까,

아니면 요리였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요리와 이민을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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