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는 ‘쟤는 호주 넘어간 게 신의 한 수였다’고도 하거든.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내가 한국에 남았다면 그럭저럭 먹고 살기야 했겠지만, 지금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무언가를 이루지는 못했을 거라는 가설에(슬프게도) 딱히 이견이 없거든.
이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험난하고 높은 산이었지만, 그만큼 고생해서라도 넘을 가치가 있었어. 적어도 나에게는. 생각보다 훨씬 더 혹독한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그 고생 끝에 달콤한 결실도 얻었고, 평생 해도 괜찮겠다 싶은 직업도 찾았어.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지금 이곳에 서 있는 30대 중반의 나는 더 이상 힘들지 않아.
가슴 아플 정도로 사랑하던 것들을 뒤로하고 도망쳐온 낯선 도시에서 난 얼떨결에 눌러앉게 됐고, 모두 계획대로 된 건 아니지만 일이 잘 풀렸어. 이곳에서 나는 꽤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 더 바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해.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원래 내 것이 아니었을 이 행운이 날아가지는 않을까 두려울 만큼.
한국에서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할지조차 몰라 난감해 하던 20대의 나와 비교해본다면, 난 차마 꿈도 꾸지 못했던 것들을 이뤘고, 크고 작은 행복들을 누리며 살고 있어. 내가 지구 반대편에서 내 이름으로 된 레스토랑을 두 개나 운영하고, 이렇게 내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으니까. 나보다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은 비웃을지 몰라도, 나는 지금의 나에게 만족해. 이렇게 오기까지 힘들고 고단했지만, 지금은 우는 날보다 웃는 날이 훨씬 더 많으니까.
종잡을 수 없이 들쭉날쭉한 날씨가 흠이기는 해도, 하늘은 언제나 높고 공기는 대체로 청명해. 멜버른의 커피는 소문대로 맛있고, 사람들은 유쾌하고 친절해. 세계 최고의 다문화 도시답게 정말 많은 문화가 공존해.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조금 다른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너그러워.
매일 아침 내가 사랑하고, 사람들이 사랑해주는 작은 가게로 출근하고, 좋은 사람들과 노는 듯, 일하는 듯 하루를 보내는 건 고단하지만 즐거워. 우리의 레스토랑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고 수많은 호주 현지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어. 수다SUDA는 멜버른 한식 레스토랑 중 팔로어가 가장 많고, 마니아층도 상당히 두터워. 내가 만든 무언가가 대중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건 정말 경이로운 일이야.
불필요한 경쟁을 싫어하고 태생이 게으른 나는, 나른한 멜버른의 템포와 잘 맞아. 공휴일에는 꼭 쉬고, 연말에는 무려 3주씩 가게를 닫고 여행을 가기도 해. 어쩌다 운 좋게 한국에서 가게까지 열었다 치더라도, 이렇게 게으르게 운영하는 건 아마 불가능했겠지. 큰 부자는 아니지만 먹고 싶은 것과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지갑을 열 수 있다는 건 정말 신세계더라. 하루에도 몇 번씩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예를 들면 조금 더 비싸지만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른다든지, 힘들 때는 택시를 탄다든지)은 정말이지, 사람의 영혼을 긍정적으로 만들어줘.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 번역 봉사나 멘토링을 가끔 맡아서 할 여유도 생겼고, 언제나 배우고 싶었던 중국어도 틈틈이 강의를 듣고 있어. 난 20대 때 사는 게 바빠서 다들 따는 운전면허도 못 땄거든. 서른여섯 살이 된 이제야 필기시험을 보고, 연수를 받으며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 올해 운전면허를 따고, 중국어로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한 수준이 되고 나면 그다음에는 수영을 배울 생각이야. 물에서 내 마음대로 자유로울 수 있는 기분은 어떨까, 언제나 궁금했거든.
지금의 내가 완벽하게 행복하다고 할 순 없지만, 행복과 어딘가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바쁘고, 가끔은 버겁다 느낄 때도 있지만 나라는 사람이 이런 일도 할 수 있고, 이런 꿈도 꿀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내가 늘 원했던 ‘긍정적이고 당당한’ 사람이 돼서 살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던 행운이야. 그리고 이렇게 사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 언제나 감사히 여기고 있어.
그런 나를 고려장이라도 하듯 내다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지구 반대편으로 도망쳐온 앨리스는 거의 다른 인격체에 가까워.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는 다음 장의 인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이야기에 나오는 별개의 인물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아.
앨리스는 구김 없이 밝아. 꼬인 구석이라고는 없고 원래부터 자신감 있고, 잘 나가던 사람처럼. 예전부터 원하는 걸 가졌고, 그걸 자연스럽게 여기고 살아온 양 웃고 떠드는, 누군가와 관계 맺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사람. 좀 쿨하고 멋진 그런 스타일 있잖아. 하지만 한국에 내가 놓고 온 가영이는, 모든 면에서 반대야.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서 새로운 자아가 나온 건지, 아니면 호주라는 사회가 내게 잘 맞아서 성격이 긍정적으로 바뀐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한국에서는 그렇게 힘들었던 내가, 왜 호주에서는 이렇게 많이 웃고 잘살고 있는 걸까. 그게 정말 궁금했던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호주와 한국을 관찰했어. 그리고 앞으로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해.
한국과 호주라는 아주 다른 두 사회에 대해.
왜 한국에서는 괜찮지 않았는데, 호주에서는 괜찮은 건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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