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은 쓸데없이 세고, 엉뚱한 생각만 하고, 밥은 거의 먹지 않고, 언제나 웅크리고 있고, 감정도 잘 표현할 줄 모르는 책벌레였어.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미스핏 misfit’이었던 것 같아.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남들과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지. 선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정상 궤도와는 점점 벌어지기만 할 뿐이니까, 그 ‘평범한 사람들’과의 틈새는 벌어지기만 했고 동시에 적응하기도 어려워졌어.
엄마와 선생님들은 나를 걱정했어. 난 어렸을 때부터 된장, 김치, 두부 같은 것들을 안 먹었어. 엄마가 먹이려고 하면 할수록 난 먹기가 싫은 거야. 아무리 어르고, 혼내고 매를 들어도 꼼짝도 않고 버텼어. 심지어 굶기기도 했는데, 별수를 다 써도 나는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어. 대문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어. 결국, 엄마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포기했고, 나는 스무 살 때까지 김치와 된장을 먹지 않았어. 맛을 본 적도 없으면서, 먹어야 한다고 하니까 왠지 더 먹기가 싫었던 거야. 학창시절 내내 급식도 먹지 않고 매점에서 대충 때우곤 했던 기억이 나.
외가와 친가를 통틀어 첫아이로 태어난 덕에 분명 넘치는 사랑을 받았는데도, 도대체 이유가 뭔지 어릴 때부터 ‘애정 결핍’의 상징인 손톱과 연필 끝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어. 너무 유별나게 심해서 엄마가 학교에 불려온 적도 있을 만큼. 연필 끝을 잘근잘근 씹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형체가 없을 때까지 물어뜯어 버리니까 선생님도 심각하다 싶었나 봐. 학교라는 단체 생활에 적응하는 게 첫걸음부터 버거웠던 것 같아.
진짜 창피하지만 사실 나, 손톱은 아직도 손톱깎이로 깎아본 적이 없어. 지금도 나는 어떤 생각에 빠지면,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입으로 향하거든.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우주 혹은 공룡,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에 관한 책만 매일매일 읽는 거야. 활동적인 걸 싫어하다 보니 밖에 나가서 놀지도 않았고, 그러다 보니 친구도 없었어. 어쩌다 친구를 사귀어도 잘 어울리지 못했어. 중학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엇나가기 전에는 그나마 성적은 좋은 편이어서 부모님이 크게 걱정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생각하는 것도 뭐랄까, 약간 이상했던 것 같아.
지금도 생각나는 건데,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야. 북한에 대한 반공 포스터를 그리는 수업이었거든. 비디오를 보는데 북한은 엄청나게 못 살고, 거지가 득실득실한 곳이래. 화려한 서울과 미국 풍경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우리는 이렇게 잘 사는데 북한은 정말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거야. 그런데도 뻔뻔하게 북한에서는 ‘남한은 거지가 득실거리는 아주 가난한 곳이다’라고 국민들을 교육한다며, 애국심이 남달리 투철했던 당시 담임 선생님은 분개하셨어. 나는 혼란스러웠어.
북한은 우리가 거짓말한다고 하고,
우리는 북한이 거짓말한다고 하는데, 누가 맞는 거지?
혹시 북한이 진짜 잘 살고, 우리가 못 사는 거 아닐까?
생각만 하고 입은 다물었어야 했는데,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선생님께 질문한 거야. 굉장히 많이 혼났어. 일주일 동안인가, 매일 남아서 화장실 청소를 했던 기억이 나.
심지어 나는 그때의 학교생활에 대한 기억 자체가 거의 없어. 어느 순간부터 학교생활이나 입시, 정규 교과 과정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져서 아예 관심을 끊어버렸거든.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이해력과 암기력은 꽤 좋은 편이었는데, 그 덕에 어느 정도 유지하던 성적도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어. 반에서 3등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로부터 딱 1년 후부터는 꼴찌에서 3등 정도였던 것 같아.
밤늦게까지 PC방이나 맥도널드 같은 곳에서 알바를 하고, 학교에 서는 정말 수업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잠만 자거나 책만 읽었거든. 선생님들도 처음에는 혼내고, 때리고 하다가 결국 포기하더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이런 걸 배운다고 실제로 써먹으면서 살까? 이런 의심이 계속 드는 거야. 국사나 문학은 재미라도 있었지. 다른 과목들은 정말 하나도 재미가 없었거든. 기술이라도 배울걸, 쓸데없이 맞지도 않는 인문계로 왔다고 생각했고, 모든 것이 진저리가 나게 지겨웠어.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이었으니까. 친구라도 있었다면 학창시절 추억을 만드는 재미라도 있었을 텐데, 글쎄, 그때의 나는 친구를 만들고 싶지도 않을 만큼 무기력했던 것 같아.
하루라도 빨리 이 감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서 돈이나 벌고 싶었어. 그때 내가 일하던 매장에는 고졸들의 신화, 알바부터 시작해서 부점장까지 오른 언니가 있었거든. 막연히 그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다들 하는 그 경쟁들 있잖아. 좋은 대학이나 직장을 얻으려는 입시 전쟁, 취업 전쟁에 덤벼들어 봤자 승산도 없을뿐더러, 그것들은 마치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졌어. 먼 세상 이야기같이 번지르르한 성공 가도보다는 눈앞에 있는 부점장 언니처럼 되는 게 더 실현 가능성이 있어 보였어. 그게 진짜 ‘어른이 돼서 돈을 벌고 독립하는 길’처럼 보였어.
진로상담 때 말이야, 담임 선생님이 나한테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었을 때,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대답했거든. 그러면 방법은 하나래. 닥치고 머리 터지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한대.
나는 혼란스러웠어. 행복이라는 게 실제로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건데, 그렇게 단순하게 얻을 수 있는 거야? 정말로? 어차피 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 말은 믿지 않았어. 좋은 대학, 직장이 정말 행복을 가져다줄 것 같지 않아서, 난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도 않아졌어.
나한테는 그 시절 친구가 별로 없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뒷자리에서 체육복을 뒤집어쓰고 자는 게 하루 일과인 애한테 친구가 있을 리 없잖아. 그때의 나를 기억하는 친구는 딱 한 명 있는데, 그 친구는 나를 이렇게 말하곤 해.
너는 굉장히 인생 다 산 아저씨 같은 여고생이었어.
오히려 30대인 지금의 네가 더 여고생처럼 밝고 풋풋하다.
너도 당연히 예상하지만, 그랬던 나를 믿어주고, 예뻐해 준 어른들은 많지 않았어.
한심하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어. 아휴, 한심하다, 이 한심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데 왜 그러니, 쯧쯧, 정말 한심하다.
나 잘되라고, 자극받으라고 했던 말이었을 거라고 애써 이해하려고 하지만, 난 아직도 ‘한심하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어. 물론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라. 내 또래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대도 다른 어른들이 나를 이해해줄 수 있겠어. 하지만 같은 나이라고 해서, 붕어빵처럼 같은 틀에서 똑같은 모양으로 찍혀 나오는 게 아니잖아. 나처럼 조금 비스듬한 애가 나올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다른 아이들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구는, 조금 이상한 모양의 붕어빵도 있을 수 있잖아. 그런 아이에게 너는 이상하다고 낙인 찍어버리면, 그 아이는 다들 이상하다고 하는 모습 이외에 다른 평범한 일면을 보이게 되는 게 괜히 어색해질 수도 있어. 남들이 나를 이상하다고 규정해버리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남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바뀐다고 해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 같더라.
사람에겐 사실 셀 수 없이 많은 모습과 다양한 자아가 공존하잖아. 아주 복잡한 존재잖아. 우리 모두가 이상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정상적이기도 한 사람인 거야. 때론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한없이 긍정적이고 다른 때는 부정적이기도 한.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내 밑에는 셰프나 매니저의 직책을 맡은 동생들이 몇 생겼어. 그 친구들이 채용을 담당할 때 내가 가장 주의시키는 건 딱 하나야.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사람을 단정 짓지 말자. 예를 들어 옷차림이나 겉모습으로. 긴장해서 한두 번 흘린 실언이나 첫인상으로 ‘얘는 별로네’ 하고 프레임을 씌워버리지는 말자는 거야. 적어도 우리는. 왜냐하면 우리 모두 겉모습, 나이, 옷차림 등으로 어른들에게 ‘쟤는 기회를 줄 필요도 없는 개념 없는 애’라는 딱지가 붙어버린 적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적어도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서로에게 약속한 거야. 솔직히 뚜껑 열어보기 전에는 절대 모르는 일이잖아.
피어싱을 하고 껄렁한 걸음걸이로 들어온 저 아이가 얼마나 기가 막히게 요리를 하는지, 핫팬츠를 입고 말끝마다 욕을 하는 저 아이가 얼마나 꼼꼼하게 서류를 정리하고 싹싹하게 손님 응대를 하는지. 함께 일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르는 일이야. 겪어보기 전에는 판단할 수 없어. 그래, 내 기억 속의 어른들은 나를 사소한 거로 속단해버렸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 거야. 매번 평가를 받기만 하는 약자의 위치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나는, 집에 오는 길마다 엉엉 울면서 절대로 저런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아직도 나는 그들이 원망스러운가 봐. 나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심한 애’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평가했던 사람들, 내가 주지도 않은 권리로 내 자존감을 마음껏 깔아뭉갰던 그 사람들을 언젠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어.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진짜로 한번 물어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
근데요, 저 잘 아세요?
본인은 얼마나 잘났기에, 나조차 잘 모르는 날 그렇게나 빨리 파악하셨어요?
도대체 내 어떤 점이, 당신에게 ‘돈 좀 모아서 시집이나 빨리 가는 게 쟤 인생 최고의 시나리오’라는 말을 하게 만들었나요?
그래서 너는 지금, 얼마나 제대로 멋있게 살고 있는 데요?
난 그 사람들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냥 아직 어리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해서 잠깐 멈춰 있었을 뿐인데. 이렇게 날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를 갈며 복수를 꿈꾸는, 못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그 사람들이 미워. 하지만 정작 그 사람들은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겠지.
이민을 내가 왜 생각하게 됐는지, 내가 왜 아주 어릴 적, 이민이 뭔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던 그때부터 이민을 꿈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이야기가 끝도 없이 길어진다. 현실적인 조언을 읽으려고 이 브런치를 열었을 너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한테는 이 모든 것들이 내 이민의 시작이자, 내 인생이 바뀌어야만 했던 이유였어. 처음부터 설명하지 않으면 이 과정을 솔직하게 다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열네 살짜리 중학생이 벽을 보고 울면서 여기는 싫다고, 다른 세상에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걸 지금 와서 떠올려보면 기분이 묘해져.
내 이민의 시작은, 이렇게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 이민의 첫날은 호주에 처음 발을 디딘 날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주먹을 쥐고 벽을 노려보면서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나와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그 기억도 나지 않는 먼 과거. 그때가 아마 내 이민의 출발점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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