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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버른앨리스 Sep 30. 2018

실패한 워홀러의 궁색한 조언들



나는 지금 멜버른에 있는 레스토랑

수다SUDA와 네모NEMO를 운영하고 있는 이민자야. 

내가 이곳에 처음 온 것은 2009년, 9년 전이고 그 시작은 워홀이었어. 83년생인 나는 88만원 세대의 초기 멤버야. 취업은 급격히 어려워지고, 토익 점수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면서 호주나 캐나다로 워홀을 가려는 청년들의 수는 급격히 늘었어. 나도 그 여파로 인해 일단은 호주에 왔지. 낯선 땅으로의 모험 이 무서웠지만 한국에서의 취업 전쟁보다는 덜 무서웠으니까.


내 워홀은 사실 누군가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줄 만큼 소중하게 보낸 시간이 아니었어. 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한국 가게에서 일하면서 매일 한국 사람하고만 어울려 다니고, 매일 놀고 영어는 하나도 안 느는,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는 워홀러’였거든


부지런하지 못하니까 하루에 몇 시간 일하지도 못했고, 시급 짜다고 소문난 한인 가게에서 겨우 8불 받았거든. 그런 알바만 전전했던 건 내가 영어를 못하기 때문이었지. 그렇다고 어떻게든 더 나은 일을 구해보려고 이 악물고 영어를 공부할 만큼 야무지지도 못했어. 주급으로 받은 돈은 딱 방값, 술값, 핸드폰 요금을 내면 똑 떨어졌어. 당연한 거겠지만 돈이 안 모이니까 돈 모으는 재미도 없고, 영어도 늘지 않으니 공부하는 재미도 없더라. 매일 친구들과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며 한국 연예인들 소식, 신세 한탄을 안주 삼았어. 그리고 매일 서로에게,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어.



야, 이게 마지막이야. 취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쉬고 노는 거야.
어차피 회사 들어가면 저금하고 자기계발 같은 거 죽자고 하면서 살아야 해.
마지막이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괜찮아.



솔직히 말하면 우리 서로 모두 알고 있었지. 지금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안 된다는 거. 취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쉬고 노는 건 좋지. 근데 그걸 굳이 이 먼 나라 호주에 와서 할 필요가 있어? 굳이 여기 까지 와서? 생각보다 영어는 안 늘어서 괜찮은 일자리를 구할 자신도 없어졌고, 외국인들 사이에서 기죽어 사느니 이렇게 한국 친구들이랑 몰려다니는 게 맘이 편하니 생활 패턴으로 굳어져버린 거지. 그런데도 허세 때문에 일단 큰소리치고 보는 거야. 지금 아니면 못 놀아. 한국 가면 취업해야 해. 그래서 내가 이러는 거야.


웃긴 건 그 모습이 딱 내가 워홀 가기 전에 ‘호주까지 가서 왜 저럴까. 진짜 이해 안 돼’ 하면서 욕했던 모습이었다는 거야. 저렇게 되진 말아야지, 설마 저렇게 되진 않겠지, 했던 그 모습이 되어버린 거야. 다행히 나는 워홀이 반쯤 지났을 무렵, 유학 이민을 준비해보기로 마음을 먹었고, 허송세월을 보냈던 잉여 워홀러 생활도 강제로 종료되었어. 그 후에도 나는 한국 가게에서 일하고 계속 한국인 들과 생활했지만, 일주일에 알바만 70시간을 넘게 했기 때문에 저런 잉여력을 발휘할 시간은 없었어. 그리고 학교에서 적응 못할까봐 두려워서 억지로라도 공부를 해야 했거든. 나는 동기 부여 없이 자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안 되는 인간이란 걸 깨달았지.


아무튼 이거 하나는 분명해. 내가 다시 워홀을 간다면

절대, 절대로 그때처럼은 하지 않을 거야!


지금은 먼 시간이 지났으니 추억이라며 웃어넘기지만, 유학 때는 워홀이라는 황금 같은 시간을 허투루 보낸 과거의 나를 아주 많이 원망했어. 워홀이 얼마나 가능성 넘치는 시간이었는지 그때는 몰랐거든. 유학, 이민의 초석을 다질 수도 있었고,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도 있었는데. 만약 내가 한국에 돌아갔다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했을 거야. 그 좋은 곳에서 그 찬란한 시간을 고작 그렇게 보냈다는 사실 때문에.


이걸 말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야. 난 워홀을 자랑스럽게 보내지 못 했지만, 너는 그 시간을 간직하고 싶은 보물로 만들었으면 좋겠어. 스물네 살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너는 물론 완전히 다르겠지만, 조금이나마 비슷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난 9년을 호주에 살며 정말 수많은 워홀러들을 만났거든. 친구들은 물론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숱한 성공과 실패 사례를 가까이서 본 사람으로서 내 조언이 조 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워홀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첫째로 워홀을 잘 보내고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인 워홀러, 그리고 워홀 후 이민을 계획하는 워홀러. 나는 첫 6개월은 전자, 후반 6개월은 후자로서 시간을 보냈어. 성공 적인 워홀 지침서는 세상에 너무나도 많고, 지금 이걸 읽고 있는 너는 아마 워홀을 넘어 그 이상에 관심 있는 사람일 테니까 후자에 더 중점을 두고 이야기할게. 사실 두 가지가 크게 다르지는 않아. 둘 다 시간을 잘 활용해서 최대한 무언가를 얻어가는 게 목표니까.


너는 아마 워홀로 많은 걸 이루고 싶을 거야.

돈을 열심히 벌어서 그 돈으로 영어도 공부하고, 여행도 다니고 싶을 거야. 외국인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다양한 경험을 하려 워홀을 왔겠지. 하지만 막상 와보면 있잖아, 영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생각만큼 돈을 벌 수 없고, 또 돈을 좀 벌려면 영어를 공부할 시간이 없을 거야.


일하면서 영어를 배우면 되잖아?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텐데, 사실 일하는 데서 배우는 영어는 한계가 있거든. 네가 레스토랑 셰프로 일하게 되면 직업 특성상 거의 말없이 일만 하다가 올 가능성이 높고, 바리스타나 홀 스태프로 일해도 손님과 하는 대화는 몇 가지로 정해져 있어. 매일 비슷한 대화만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 물론 안 하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만, 원하는 만큼 배우기는 힘들 수 있다는 말이야. 일하면서 영어를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영어가 늘었다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어. 일터에서 만나게 된 외국인 동료들과 친분을 쌓아서 밖에서 만난다든지, 함께 어울린다면 영어가 많이 늘긴 하겠지. 하지만 상담 같은 일이 아닌 이상, 일하면서 쓰는 영어는 매일 똑같아. 막연히 외국인들과 일하면 영어가 늘 거라고 생각한다면 실망할 수 있어.


네가 영어 공부에 중점을 두면서 동시에 일도 해서 여행을 가거나 한국에 목돈을 챙겨가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면 그것도 쉽지는 않아. 아마 넌 오자마자 어학원을 등록할 거고, 어학원 수업 외의 시간에 할 수 있는 알바를 빡빡하게 구할 거야. 그래서 공부도, 일도 열심히 하겠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몰라. 나도 그랬거든. 하지만 이게 어려운 게, 호주는 수업 시간이 길지 않고 분위기도 자유롭기 때문에 수업 자체에서 영어가 빨리 늘진 않아. 한국의 엄격한 학원과는 완전히 다르거든. 수업을 얼마나 흡수하는지는 오롯이 학생의 몫이야.


영어가 빨리 늘은 경우를 보면, 대부분 학원에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고, 여러 사람과 사귀어보는 등 활동을 많이 한 친구들이야. 하지만 알바가 바쁜 친구들은 그렇게 하기가 힘들지. 다른 친구들은 주말에 모여서 바비큐도 하고, 어울려 다니며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고 친해지는데 매일같이 바쁘게 일하는 친구들은 그런 기회를 놓치게 되고, 하루에 몇 시간 안 되는 수업에서 배우는 영어로는 턱도 없고……. 그렇게 지쳐버리는 경우가 정말 많아. 숨 돌릴 틈도 없이 수업과 알바를 병행하는데, 목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어가 빨리 느는 것도 아니니까






여행도 마찬가지야.

돈을 벌고, 영어를 배우며 최대한 여행을 많이 다니겠다는 계획을 짜잖아.

그럼 일단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야겠지. 일을 구하고 안정되려면 보통 2~4주 정도가 걸려. 이력서 돌리고, 면접 보고, 수습 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시간표를 받아서 제대로 돈을 벌기 시작하려면 보통 한 달은 필요해. 처음부터 초보자에게 일을 많이 주는 경우는 드물어. 익숙해지면서 점점 일할 수 있는 시 간이 늘어나는 거지. 그러면 어떤 일터에서 고정적으로 돈을 벌어서 그걸로 생활하고 저금할 수 있는 시기는 보통 4주가 지난 후거든. 그렇게 두세 달 일해 모은 돈으로 여행을 갈 수도 있지만, 그러고 나서 돌아와 또 저 과정을 반복하려면 당연히 생활이 쪼들리고, 호주에서 누려야 할 소소한 기쁨을 못 누리고 지치게 되지. 예를 들면 햇살 좋은 날에 유명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든지, 루프탑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진짜 해외살이에서 할 수 있는 경험들. 물론 직장에 적응하기도 힘들 거야. 돈도 많이 벌고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가겠다, 많이 경험하고 목돈도 벌어가겠다는 계획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어.


당연히 최대한 많은 것을 이루려고 노력해야겠지만, 나는 네가 꼭 우선순위를 정했으면 좋겠어. 다른 건 포기하더라도 반드시 얻어가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가지를 먼저 정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어.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무엇인지, 세 번째는 무엇인지. 두 가지만 제대로 만족하고 가도 정말 큰 성공이라고 생각해!





혹 그런 방법이 너무 아쉽다면, 전반전 후반전을 나누어서 하는 것도 좋아.

전반전에는 돈만 죽자고 번다고 해봐. 얼마를 모으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도 좋고. 대신 일하면서 외국인 친구들을 사 귀고 영어를 익히는 것은 기쁘게 보너스라고 생각해. 쉬는 날 호주 생활을 여유롭게 즐기고, 휴가를 받아 다른 지역으로 여행도 다니면 더 즐겁겠지.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게 즐기되 돈 이외에는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거야. 그 후 후반전 6개월이 오면 다른 목표, 영어나 여행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거야. 영어에 무게를 두기로 마음 먹었다면 어학원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알바는 생활비 정도만 벌고, 어학원 친구들과 어울리고 도서관도 다니면서 제대로 공부를 하는 거지. 아니면 반대로 처음에는 어떻게든 목돈을 가지고 와서 영어만 파고든 다음에, 어학원 수업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 마지막 한두 달은 여행을 하는 것도 좋고.


어설프게, 나는 돈도 많이 벌고 영어 실력도 늘리고 여행도 최대한 하다 와야지! 하는 식으로 어중간하게 하면 정말 죽도 밥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아. 꼭 이거 하나는 얻어가겠다는 목표 하나만 잡고 그 다음에 이루고 싶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기. 아쉽다면 기간을 나눠서 플랜을 짜보기. 알았지?






하고 싶은 경험, 혹은 이루고 싶은  표를 몇 가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는 걸 강력 추천해.

그런 리스트를 만들어서 하나하나 달성하고 나면 굉장히 만족감이 크더라.


1. 토익 점수를 ○○점까지 올리겠다.

2. 돈을 모아 우리 엄마 평생 첫 명품 가방을 사주겠다.

3. 적어도 세 개의 도시에는 살아보겠다.

4. 멜버른 베스트 카페 TOP 10의 브런치를 모두 먹어보겠다.

5. 언어 교환 프로그램에 참여해보겠다.


거창하지 않아도 돼. 사실 거창하지 않을수록 좋아.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어야 하고 세 가지가 넘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일단 호주에 오면 하고 싶은 일이 더 많이 생길 테니까. 포기하거나 이루지 못하는 목표들이 쌓여가는 건 자존감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 그러니까 무난하게 이룰 수 있는 걸로 잡았으면 좋겠어. 어려운 목표를 설정해놓고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주객전도가 되기도 하더라고. 어떤 친구는 토익 만점을 목표로 잡고 와서 워홀 내내 도서관에 박혀 있었어. 본인도 한국에서와 다를 것 없는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고, 보는 나까지 안타까웠던 기억이 나.


어떤 사람들은 그런 목표를 듣고 워홀 와서 이루고 싶은 게 고작 그거냐고 말하기도 해. 하지만 신경 쓰지 마. 너는 네 기준에 맞춰서 만족스러운 워홀을 하면 돼. 네 기준에 맞춰 살고 싶어서 워홀을 온 거니까 말이야.




이걸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

너는 해외에서 살아보려고 오는 거야.

만약 네가 한국에서 부모님 밑에서 생활하다가 오는 거라면 처음으로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생활을 할 거야. 그것도 해외에서. 무섭지만 설레는 일이지. 해외에서 1년을 살아보는 것만으로 대단한 경험이야. 40, 50대가 되어 돌아봐도 기억에 남을 만한 대단한 1년이 될 거야. 난 네가 호주에서 ‘살아본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호주 생활 자체를 즐기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어. 내 주위에는 노심초사하는 애들이 많았거든. 무언가 특별하고 굵직한 일을 해야 워홀을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하지만 이런 애들은 또 정작 보면 허송세월하고 있진 않거든. 그런데 그 친구들은 소소한 일상들 말고 좀 특별한 일을 해야 할 것 같다는 거지. 외국에 살아 보려고 오긴 왔는데, 이렇게 ‘생활’만 해서는 무언가 부족한 거 같은 거야. 시간이 한정돼 있으니까.


그런데 헤어진 연인을 생각해보면 어떤 엄청난 이벤트나 대단한 풍경이 떠오르는 게 아니잖아. 소소한 일상들, 미처 소중한지 몰랐던 시간들이 더 기억에 남잖아. 똑같아. 워홀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후, 너는 아마 호주에서의 그 일상들을 추억하게 될 거야. 아침마다 알바 가며 들린 카페 바리스타와의 인사, 어학원 친구들과 추운 날 오들오들 떨면서 했던 바비큐, 만 원도 안 되는 저렴한 치즈와 와인 을 사와 홀짝거리며 미드를 보던 기억, 그런 순간들 있잖아. 더 특별한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고, 호주에 와서까지 이렇게 그냥 생활만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했던 그 시간들이, 네가 나중에 떠올릴 시간이란 걸 기억해줬음 좋겠어.


살아볼 때는 그냥 그 생활을 즐기면서 살아봐.

지금을 살면서 내일만 바라보다가는 지금을 놓치니까. 자잘하게 호주에서만 해볼 수 있는 ‘일상의 경험’을 늘리려고 노력하면서 생활했으면 좋겠어. 특별한 일을 해보는 것도 좋지만, ‘특별한 경험’을 갈망하다가 외국 생활의 즐거움을 놓치는 건 조금 바보 같은 일이야. 살아보는 일을 즐겨! 소소하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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