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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상하는 마케터 Mar 08. 2022

우울 명랑 자살 토크쇼

자살에 대하여

이상하게 주변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다. 가족, 친구, 지인 등. 아무리 힘들어도 20대까지는 자살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어 엄마와의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난생처음으로 '아, 이래서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구나.'하고 이해가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살을 막지 못하고, 허망하게 떠난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아 있는 이들의 가슴에는 하나 같이 공통적인 감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죄. 책. 감'이다. 혼자 이렇게 힘들어하던 그 사람을 왜 도와주지 못했을까, 자살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 사람을 보내고, 나 역시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자살을 말리기 쉽지 않겠다'라는 것이다.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어려운 시점까지 가게 되면,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그 상황에 이르기 전에 자살을 생각하기 전에 도와줄 수 있다면 모를까. 자살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라는 생각' 그리고 '내가 이토록 괴롭다'는 생각 외에 다른 것을 보고 듣기가 어렵다. 




한 동안 '자살'에 대해 잊고 지냈다. 그러던 중 10년 전쯤 같이 일했던 대표님에게 전화가 왔다.


"신치야, 잘 지내니?"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전화를 하는 사람이다. 전화가 오면 나는 그저 덤덤하게 듣는다. 얘기하는 만큼 듣고, 담백하게 대답해 줄 뿐 얘기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 굳이 꼬치꼬치 캐묻는 편은 아니다.


전화 통화의 끝을 향해 가면서 얼마 전 큰 딸이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본인 때문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했다.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서 스스로도 가족에게 난폭하게 대했다고 고백했고, 자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잘못했네. 그럼 당연히 책임이 있죠. 난폭하게 대했다면."

"역시. 너야. 다른 사람들은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하는 등의 말로 위로해 주는데."


어린 시절 난폭했던 아빠를 떠올리며 큰 딸의 감정에 이입했고, 충분히 아빠 때문일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는데, 밤새 이상한 꿈을 꾸고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대표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난 아빠가 난폭하다고 해서 자살까지 생각하진 않았어.'


괜히 당신 잘못이라고 얘기해서 안 그래도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더 큰 마음의 짐을 지운 것은 아닐까 하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아침에 문자를 보냈다.


"제가 또 어제 잘못했다는 대표님 말에 너무 긍정(?) 한 건가 싶기도 하고. ㅎㅎㅎ 어떤 여자분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계속 자살 충동이 있었데요. 알고 보니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니가 애를 지우려는 생각을 했다고… 눈에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는 것들이 지금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생각보다 많이 미치고 있기도 하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지금의 잘못은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 더 나아지면 되죠.ㅎㅎㅎ"


다행히 대표님은 내 말에 공감해 주었고, 고맙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가까운 인연이 처음으로 자살을 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드디어 자살에 성공했다. 안타깝지만 서로의 행복을 위해 잘 떠났다'라고 말이다.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후에서야 비로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하고, '자살할 정도의 괴로움'을 경험한 뒤에야 그때 그 사람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자살을 선택했을까 하고 말이다. 그제야 나 역시 그 자살을 선택하게 한 가해자 중 한 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친한 친구의 자살 소식은 경찰관을 통해 들었다. 자살한 친구의 핸드폰에서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마지막에 만난 사람도 바로 나와 다른 내 친구였다. 우리는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친구가 힘들어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하하호호 웃으며 술자리가 끝났다. 그런데 며칠 뒤에 경찰관을 통해 친구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만난 마지막 날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 보려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몇년 뒤 어느 여름 날 오후, 함께 일했던 사장님의 본인 부고가 전해졌고, 급하게 찾은 장례식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음을 알게 되었다. 너무 밝고 쾌활한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자살까지 생각했을까, 무엇이 그를 자살을 실행하게 만들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미 수많은 이들을 자살로 떠나보내고 몇 년 뒤, 나 역시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들의 선택에 아주 조금은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그 누구도 내 편이 없다고 느껴진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나를 위한 말도 전부 다 비난으로만 들린다,

내가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느껴진다,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짐인 것 같다,


진지하게 자살이란 단어를 고민할 때,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다. 이런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그 감정들을 바꾸거나 제어할 수 없었다. 헤어 나오려 할수록 점점 더 빠져드는 늪에 빠진 것처럼 우울이란 감정은 나를 결국 자살이란 늪까지 끌고 갔으며, 자살을 실행하고 싶은 충동에 계속 가까이 밀어붙이고 있었다.


모든 힘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나 역시 그렇게 힘들게 된 이유가 분명히 존재했다.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나를 옥죄는 상황에서 벗어나자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상황은 변했지만 힘든 상황이 생길 때마다 때때로 자살에 대한 생각이 나를 찾아왔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현재 누가 보기에도 정말 행복한 상황이지만, 엄마 뱃속에 있을 때의 영향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는 걸 보면 생각보다 자살을 부르는 원인은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 같다.


명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내 마음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을 배웠고,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되면서 가끔 일어나는 자살에 대한 생각을 자각한다. 


'뭐야. 너 왜 뜬금없이 자살을 생각하는 거지?'


라고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넣어 둬, 넣어둬. 자살은 답이 될 수 없어.'



배우고 또 가르치고 있는 명상을 통해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방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실행해 보고 싶다. 죽고싶지만, 사실은 정말 살아보고 싶은 이들을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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