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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상하는 마케터 Oct 20. 2022

엄마와의 대화

2012년


엄마와 대화가 길어지면 항상 짜증으로 끝난다.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이번 주말도 역시 그랬다. 엄마는 내게


“넌 왜 그렇게 나한테 짜증 내면서 말해?”


라고 물었고, 나는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라는 표정을 엄마에게 던지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카페에 가는데 또 눈물이 난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짜증과 화를 가장 많이 내는 대상은 엄마다. 3년 전, 심리상담을 받을 때는 이상하게 엄마 얘기만 나오면 눈물이 났다.

엄마와 대화할 때는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엄마와 얘기를 하다 보면, 내 속의 분노가 끓어오른다. 

나름 참아 보려 애를 쓰지만, 오늘처럼 대화가 길어지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고 결국 폭발한다. 그

래서 열 번 중 아홉 번은 집 밖으로 뛰쳐나와 대화의 흐름을 끊어버린다.


오늘은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아침에 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 전체를 마음먹고 싹 치우고 싶었다. 다시 말해 몽땅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버리고 싶은 물건의 대부분은 엄마 소유였다. 괜히 버렸다가 욕먹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내 방의 물건부터 치우기로 했다. 붙박이장에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을 골라 버렸다. 청소를 끝내고 나가려는데 테니스 새벽 레슨을 받은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나 집.”

“그래? 엄마 이제 집에 가려고 하는데, 너 또 나갈 거지?”


엄마와 있는 시간대가 다른 내게 엄마를 ‘자기를 피해서 나간다’고 얘기를 한다.


“어, 나 지금까지 방 청소하고 이제 씻고 나가려고.”

“그래? 엄마 지금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회 사서 갈 건데, 먹고 나가~”

“알았어. 그럼 빨리 와.”


쓰레기를 버리러 간 사이에 엄마가 도착했다. 엄마가 사 온 까만 봉지들이 좁은 부엌 통로에 널려 있다. 엄마는 얼마 전에 사 왔지만 다 죽어버린 모종들을 버리고, 새로 사 온 모종을 심고 있었다.


‘이번에는 잘 키우려나?’


생각하며 엄마가 모종 심는 모습을 지켜봤다. 새로 심은 모종은 이미 발 디딜 틈 없는 베란다로 옮겨졌다. 다시 화장실로 돌아온 엄마는 남아 있는 죽은 모종이 담긴 화분을 보며 말했다.


“저 화분에도 다시 사서 심어야겠다.”


순간 버럭 화를 내며 엄마에게 말했다.


“또 산다고? 있는 거나 우선 잘 키우시지??”


엄마는 알았다며,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엄마는 결국 모종을 더 사서 남은 화분에 심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식물들을 얼마나 잘 키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모종 심기가 끝난 후, 엄마는 수산 시장에서 사 온 생선을 꺼내 회를 뜨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회 떠 주는 비용 5천 원이 아깝다며 집에서 직접 회를 뜨기 시작했다. 점점 회 뜨는 실력은 늘었다. 하지만 생선 비린내를 싫어하는 나는 회 뜨는 동안 비린내를 맡고 나서 도저히 회를 먹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 결국 엄마와의 저녁 식사에서 회를 한 조각만 겨우 먹었다. 그리고 딸 주겠다고 애써 회를 사 온 엄마는 서운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저녁 시간부터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마음이 상하기 시작했다. 나오는데 엄마가 한 마디 한다.


“어제 테니스 코치가 얘기한 거 기억하지? 자기가 잘 가르쳐줘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걸로 어떻게 만드냐에 따라 다르다니까, 열심히 해서 니 걸로 잘 만들어봐.”

“어,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엄마와 대화할 때 가장 많이 얘기하는 게 바로 “내가 알아서 할게”다. 지난달부터 엄마의 권유로 테니스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테니스를 치기 시작한 엄마는 테니스 마니아다. 자식들과 같이 테니스 경기를 하는 것이 엄마의 로망 중 하나다. 그래서 엄마의 권유로 중학교 때 테니스부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번에는 테니스 레슨을 받는 시간만이라도 엄마와 같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시작했다.


어찌 됐든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리고 테니스 레슨 받을 때, 너무 웃지 마. 수업받는 데 성의가 없어 보여.”

‘하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또 짜증을 버럭 내며 말했다.


“나 이번 달까지만 할게.”


웃는 것 하나까지 얘기하는 엄마와 더 이상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의 대화에서 내가 분노하는 포인트는 도대체 무엇일까?

사실 이건 지금 당장의 문제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계속 있었던 문제다. 내가 화를 내는 포인트를 살펴보면 ‘엄마가 내게 본인의 생각을 강요할 때’, ‘엄마가 나에 대해 마음대로 판단하고 해석한 것을 가감 없이 표현할 때’다. 나는 분명 엄마와 다른 사람이고,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내게 확인하지 않고,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이 어릴 때부터 참 싫었다.


어릴 적 엄마는 내게 무서운 사람이었다. 화를 내고, 혼내면 ‘그냥 내가 잘못했지’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내 생각이나 의도를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분노의 감정이 계속 쌓였다. 엄마에게 화가 나는 부분을 이해시키기보다 화와 짜증으로 표출해온 것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번 일방적으로 엄마에게 화를 내고 집을 나오면서 ‘그러지 말아야지’하고 다짐하지만, 변하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 읽은 <비폭력 대화>란 책에 나온 문구가 생각난다.


“우리 자신이 먼저 변하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는 먼저 다른 사람이 변하기를 기다린다.”


내가 먼저 변하면 된다. 엄마와 대화할 때 화가 나면 ‘왜 화가 나는지’ 이야기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가 변하지 않는데, 내가 변한다고 되겠어?’하는 생각도 공존한다. 그래서 늘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이렇게 내 입장을 일방적으로 쓰고 있으니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란 생각이 든다. 엄마도 나름대로 화가 나겠지. 많이 참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늘 내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왜 가족 빼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겐 그렇게 친절한 거냐?”


이것이 바로 엄마가 내게 가지는 불만의 핵심이 아닐까.


‘거리 두기’


가족 사이에도 거리를 둔다면, 다른 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친절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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