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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상하는 마케터 Oct 20. 2022

아빠를 이해하다

2012년


엄마는 내게 전화를 자주 했다. 주로 심부름시킬 일이 있거나, 여느 엄마들처럼 딸의 위치를 알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12시 안에는 들어갈 거야’라는 대답에 평소라면 ‘그래, 적당히 놀고 들어와’라고 쿨하게 대답하던 엄마가 사라졌다. 집에 도착하기로 약속한 그 시간부터 수십 번씩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한 번은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들어가겠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 시간에 나는 여전히 술자리에 있었고, 전화를 건 엄마의 목소리는 매우 격앙되어 있었다.

“야, 지금 몇 시야? 너 몇 시에 들어온다고 했어? 10시? 근데 지금 몇 신데? 너, 진짜 엄마 죽는 꼴 볼래? 넌 어쩜 이렇게 너네 아빠랑 똑같니?”


라고 버럭버럭 화를 냈다. 전화를 끊자마자, 무거운 마음과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 아빠랑 내가 뭐가 같다는 거냐?’


나 역시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나는 건, 그렇게 화를 내던 엄마가 집에 도착하면 언제나 세상모르고 아주 편안하게 주무신다는 거다. 차라리 전화로 화를 냈던 그 상태 그대로 내게 다시 화를 낸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매번 이런 식이다. 엄마는 늘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내게 마구 던진다. 그걸로 끝이다.


안 그래도 일과 진로 문제로 머릿속이 복잡한데, 엄마까지 나를 못살게 구니 이제는 정말 도망칠 구석이 없다. 그나마 엄마는 일을 하고 있어 내가 눈 뜨기 전에 집을 나간다. 그래서 마주칠 시간이 적어 숨통이 좀 트였다.



알 수 없는 화를 낸 지 3개월이 되었다. 이제는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하루라도 빨리 동생이 있는 호주로 도망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날 새벽, 엄마는 자는 나를 깨웠다.


“엄마, 오늘 일 못한다고 얘기할 거야. 그러면 일 못해서 못 받는 돈은 어떡할 거야?”


비몽 사몽인 나는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나를 보고 또 한 마디를 하신다.


“너는 남들이랑은 맨날 희희낙락 얘기도 많이 하면서, 엄마랑 겨우 이렇게 이야기하는 시간에 눈도 제대로 안 뜨냐. 내가 너네 아빠 살아 있을 때도, 네 사람을 먹여 살렸는데 말이야. 다 컸는데 아직도 너네를 먹여 살리고 있어야 해? 넌 언제 엄마 먹여 살릴래?”



내가 태어난 직후 사고로 뇌를 다쳐 몇 년간 식물인간처럼 있었던 아버지. 기적처럼 깨어났지만 여느 가장처럼 생계를 책임지기는 어려웠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 일을 하다 다쳤기 때문에 회사에서 생활비를 받았다. 하지만 IMF를 겪고 회사가 사라지면서 엄마와 아빠는 치킨집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아빠는 가장으로 의무를 하기 위해 나름 애를 썼다. 택시 운전, 과일 트럭 등을 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런 아빠를 보며 엄마는 늘 답답해했다. 그리고 지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제대로 된 일을 못 하고 있는 서른 넘은 딸을 보며 마치 아빠를 보듯이 답답해했다.


‘아… 아빠가 엄마 때문에 정말 힘들었겠구나.’


이 3개월 동안 엄마에게 시달리면서 처음으로 아빠의 마음을 이해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답답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안 그래도 되는 일이 없어 힘든데, 옆에서 도대체 어쩔 거냐고 다그치니 계속 절벽 끝으로 나를 미는 것만 같았다. 한 발만 뒤로 더 가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엄마와 이대로 살다가는 죽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늘 ‘가장으로서 역할은 도대체 언제 할 거냐?’고 잔소리를 듣던 아빠가 무척 외롭고 괴로웠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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