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넥스트 커리어 코치 Oct 20. 2022

아빠의 장례식

2002년 봄


학기를 시작한 봄이었다. 평소 연락도 잘 안 하는 아빠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기차 여행도 할 겸 딸을 보러 학교 앞까지 왔다고 한다.  잠깐 기다리라고 얼른 전화를 끊고 아빠가 기다리는 학교 정문으로 갔다.


오래간만에 고향이 아닌 서울에서 만난 아빠였지만 나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아빠는 도대체 왜 말도 없이 여기에 온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와 함께 캠퍼스를 걷는데 친구들이 인사를 했다. 절룩거리며 걷는 아빠가 몹시 부끄러워 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빠른 걸음으로 아빠를 앞서 갔다. 그리고 아빠에게 2평 남짓의 자취방 문을 열어 주고 다시 학교로 가 버렸다.


“아빠, 여기서 좀 자다가 집에 가. 나 수업 있어서 갈게.”


몇 시간 후에 아빠에게 문자가 왔다.


“아빠 다시 대구 간다.”

“네. 아빠, 잘 가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큰딸 학교는 어떻게 생겼는지, 서울에서 혼자 잘 살고 있는지 한 번 보고 싶어서 먼 길을 온 아빠였다. 그런 아빠에게 말 한마디 살갑게 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1분 거리의 집인데도 학교 구경 한 번 시켜 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가 떠났다는 문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중학교 때 아빠에게 가진 분노의 마음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였다. 오히려 더 커지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2005년 초


홍대로 가는 지하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왜?”

“너희 아빠가…”

“아빠가 뭐?”

“죽었어.”

“…”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리고 바로 서울역으로 갔다. 기차를 타고 창밖을 보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아빠의 장례를 치르는 3일간 서울에서 많은 친구 그리고 선후배들이 다녀갔다. 한 선배가 집으로 가면서 배웅하는 내게 담배를 건네며 얘기했다.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생각보다 밝은 표정이라서 놀랐어.”


그랬다. 나는 아빠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밝은 표정이었다. 많이 슬퍼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아빠였지만, 아빠 때문에 다른 가족들은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남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 아빠가 잘 떠난 거야. 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그게 사실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