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여름
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작은 방에서 부모님의 다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언쟁은 아빠의 일방적인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빠가 아이들 앞에서는 그나마 자제력이 있기 때문에 엄마는 곧 거실로 나왔다. 하지만 그날은 우리가 있건 말건 폭력이 시작됐다.
나는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이불속에서 숨죽여 울기만 하는 어린아이가 더 이상 아니었다. 자제력을 잃은 아빠의 분노 못지않게 나의 분노도 극에 달했다. 밥을 먹고 있던 나는 눈에 보이는 큰 식칼을 들고 거실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 아빠를 향해 소리 질렀다.
“제발 그만하라고. 더 이상 못 참겠어. 아빠 죽여버릴 거야!!!!!!!”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울면서 아빠를 향해 소리 질렀다. 순간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 자체가 너무 슬프고 짜증 나서 정신을 놓을 정도로 울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때 엄마가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우리 아기 착하지…?”
그리고 내 손에 있던 칼을 가져갔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고, 식칼 사건은 거기에서 끝났다. 아마 내가 조금 더 미쳤더라면 아빠를 내 손으로 죽였을지도 모른다. 정말 죽이고 싶었다. 아빠만 세상에서 사라지면 남은 식구들은 정말 화목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건 이후로 아빠와 엄마가 눈앞에서 싸우는 횟수는 줄었다. 부모님 모두 ‘그렇게 착하고 말 잘 듣는 딸’이 갑자기 미친 X이 되는 걸 보고 충격이 크긴 컸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