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 없을 수가 없지.’ ‘맛있을 수밖에 없어.’ 따위의 말들이 있다. 소위 먹방을 보다 보면 지겹도록 듣는 말이다. 도대체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누군가 궁금할 지경이다. 찾아가서 한마디 해주고 싶다. 진절머리가 난다고. 누가 이런 창의성이라곤 눈곱만큼도 담기지 않은 말을 널리 퍼트렸는가. 먹방 보는 걸 좋아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문장이 귓가에 박히면 생겼던 입맛이 도로 싹 사라지고 만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말이다.
그렇담 이 말은 어떨 때 쓰이는가. 단순하게 맛있다고 할 때 쓰는 표현인 듯하지만, 아니다. 재료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런저런 재료가 들어갔으니 맛없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예컨대 부대찌개를 먹는다고 해보자. 햄과 소시지, 베이크드빈스를 준비한다. 그 위에 떡과 라면 등 각종 사리를 올리고 육수와 다대기를 넣어 끓인다. 그러면 누군가는 이 광경을 보고 ‘맛없을 수가 없지’ 한다. 자신이 봤을 때 이 배합이 맛이 없다면 이상하다는 주장이다. 뒤집어보면 이 말은 온갖 맛있는 재료가 모이면 반드시 맛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면 이 재료로 이 정도의 맛은 당연히 낼 줄 알아야 한다는 소리다.
유튜브에 맛없을 수 없는 조합이라고 치면 영상 목록이 끝도 없다. 떡볶이에 삼겹살을 넣으면 맛없을 수가 없지, 한우로 갈비찜을 하면 맛없을 수가 없지, 제육볶음에 치즈를 솔솔 올리면 맛없을 수가 없지 등등. 워낙 많아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다. 참으로 빈곤하고 책임감 없는 상상력들이 아닌가. 눈치챘을진 모르지만 ‘맛없을 수가 없어’의 대상은 왜인지 몰라도 항상 대중적인 음식에 국한된다. 평범한 사람이 만든 평범한 음식 말이다.
웃기는 일이다. 파인다이닝에는 맛없을 수 없다는 말이 적용되는 꼴을 못 봤다. 보면 누가 제보해달라. 웬만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장시간 햇볕에 말린 썬 드라이 토마토와 각종 버섯을 곁들인 제철 대구 스테이크’에는 군말하지 않아도, 동네 순댓국집에 가서 순댓국에 깍두기를 말아 놓고 맛없을 수가 없어, 한다. 순댓국은 좀 덜 번거로운가? 비싼 음식에는 대단한 기술이 서려 있나? 분초를 다투는 치밀한 계산은 ‘셰프’라 불리는 사람들만 하는가? 그렇지는 않을 테다.
나는 ‘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중한 일을 하는지 안다. 우리 부모님은 지난 40여 년간 횟집을 했다. 새벽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새벽에 나가서 장을 보고 가게 문을 열었다. 또 새벽에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 같은 오늘’을 준비했다. 하루가 24시간이라는 말은 누군가에겐 사치로 들린다. 24시간으론 부족한 사람들이 이 나라엔 많다. 자영업자에게 밤 10시 마감을 치는 그날은 직장인들이 말하는 ‘칼퇴’와 다름없는 날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살기 위해 처절하게 산다.
음식을 대하는 데도 태도가 필요하다.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이고 존중의 차원이다. 그들이 한마디 한마디에 얼마나 일희일비하는지 아는가. 맛없을 수가 없다? 이런 표현은 만든 이에 대한 예의도 뭣도 아니다. 선거철 공약만큼이나 공허하다. 유튜버나 연예인들이 자기들 딴엔 맛있다 하는 말인 모양인데, 역지사지해봤으면 좋겠다.
스탠딩 무대에 서 있는 코미디언 보고 ‘넌 얼굴이 개그 그 자체잖아. 웃길 수밖에 없지. 안 그래?’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신체조건이 사기네. 이길 수밖에 없어. 넌 메달 못 따면 안 돼!’ 사진가를 가리켜 ‘카메라 비싼 거 쓰니 사진도 잘 나오는 거지.’ 이렇게 말하면 말이 되는가? 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대에 서기 위해 코미디언은 대본을 짜고 예행연습을 하며, 운동선수는 단 며칠의 날을 위해 수년간 몸을 갈아내 준비하고, 사진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창작의 시간을 어떻게든 눈에 보이는 형태의 결과물로 내놓아야 한다. 카메라의 수준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말이다. 우리는 어떤가. ‘이 프로젝트는 잘될 수밖에 없었어. 애초에 상황이 좋았잖아. 네가 한 게 뭐 있어?’
대충 눙치고 넘어가면 안 된다. 모든 승리의 과정엔 피와 땀이 배어 있다. 음식도 그렇다. 세상 어디에도 당연한 노동은 없는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단순할 것 같았으면 고통이란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맛보는 맛있는 음식 뒤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성공에 대한 기쁨, 그리고 그 마디마디에 초라하면서도 찬란한 감정들이 녹아 있다. 여러 번 실패했을 것이다. 여러 번 다듬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반응을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봤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과정이 있기에 음식은 맛있다. 맛이 없을수가 없다는 말은 그래서 불편하다.
지금 우리 부모님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횟집을 관두신 지 꽤 오래됐다. 그래도 그들 몸에 쌓인 시간은 여전하다. 상흔이 선명하다. 칼에 저며 알록달록한 손을 보고 있노라면 어찌 인간의 몸은 이리도 솔직한가 생각한다. 노동의 결과가 어디 가는 건 아닌가 보다 한다. 직업병 탓인가. 가끔 부모님은 알토란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평생 음식을 했는데 질리지도 않으신가. 유명한 요리연구가나 셰프가 나와 요리를 시연하면, 다음날 곧장 따라 하신다.
언젠가 계란장이라는 걸 그렇게 먹어봤다. 맛이 참 독특했다. 맛있다, 표현하기엔 어딘가 부족하고, 또 맛이 없는 거 같진 않고. 한입 베어 물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니, 똑같이 하려 해도 똑같이 맛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다. “이 재료 저 조미료 더하면 뚝딱 나오는 음식이 있을까? 글쎄” 툴툴대시며 그렇게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하셨다. 그 뒤로 계란장을 다 먹고 일주일 뒤 새롭게 만든 걸 먹어봤다. 상큼하고 감질나는 게 눈부신 맛이 아닌가 했다. 한동안 밥반찬으로 딴 거 곁들일 필요가 없었다. 김치 하나 보태면 그만이었다. 왜 맛이 달라진 거냐 물으니 재료는 별다를 게 없다고 하셨다. “숙성이 잘 됐나?” 하고 말 뿐.
모든 음식은 필연이고 운명 따위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맛있는 음식은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수반된다. 그럴듯한 재료를 때려 넣는다고 없던 맛이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부디 알아줬으면 한다. 맛없으면 이상한 게 아니라, 맛있으니 특별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