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와 B가 사귄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 “A가 좀 아깝지 않아?” “맞아 진짜 안 어울려. A가 너무 아까워” 둘을 놓고 품평질이 시작된다. 가십이 오가는 자리다. 점심시간쯤 되려나. 거기에 A와 B는 없다. 그들은 껌처럼 소비된다. 질겅질겅 씹힌다. 둘 중 누가 더 나은지 비교당한다. 사람들은 청문회라도 여는 양 자못 태도가 진지하기 짝이 없다. 이런 자리는 보통 두 남녀가 만나기 시작한 초반쯤 열린다. 검증이랍시고 떠들어댄다. 지인이니까 자격은 충분하다고 그들은 어렴풋이 넘겨짚는다. 설령 지인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을 몰라도 자신이 상대를 알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게 그들이 스스로 부여한 권리이자 권위다.
‘누가 더 아깝다’는 말은 만남도 급이 맞아야 순탄하다는 사고 체계의 발로다. 외모, 재산, 학벌 등의 요소로 체급을 결정짓고 획일화된 만남을 강요한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기어코 승리자를 찾아낸다. “A는 B를 왜 만나지?” 따위의 삭막한 말이 오간다. 거기엔 사람이 없다. 물건만 있을 뿐이다. 사람에게 물성을 부여한다. 가격표를 붙이고 바코드를 찍어 굳이 셈을 하려는 행위다. 천박하다. 물물교환하듯 A와 B의 값이 등가여야만 합리적인 만남일까. 아니, 애초에 만남이 합리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인간의 낯빛까지 돈을 매겨 수치화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면,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건에 부여된 물성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본래 만들어진 쓰임새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사람의 인성은 영속성으로 읽히지 않는다. 누군가의 쓰임새는 제삼자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인간은 자라고 때로는 꺾인다. 연약하다. 자신의 껍질을 탈피해 외부에 다가가려는 시도를 심판하려는 건 오만이다. 어찌 단단해질 시간은 주지도 않고 짓누르려 하는가. 왜 남 연애에 이러쿵저러쿵하는가. 의미와 형태를 달리한 모든 낱말에 일일이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감정에 값을 매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억지로 가격을 책정해봤자 그것이 영원하진 않을 테다. 되려 가격표를 붙이는 사람이 시장에 도매가로 풀릴 날이 올 것이다. 반드시. 알량한 태도로 심판자를 참칭하려 든다면 그 역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초등학생 시절이 기억난다. 육학년 때쯤이던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한창 꽃필 무렵에 나는 사람들이 열애설에 왜 그리도 발광하는지 의문이었다. 누가 더 낫다고 싸우기까지 하는데 그게 왜 싸울 일인지도 궁금했다. 의구심은 끝끝내 해결되지 않았고 오늘도 난 똑같은 생각을 한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못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 건, 이 땅의 아이들이 자라나 인간을 미식하는 행위에 길들어 계산 잘하는 어른이 될까, 그게 겁나서다. 고백하건대 이렇게 말하는 나도 사실 값을 매긴 적이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도대체가.
여전히 어떤 사랑은 누군가에게 인력시장으로 비친다. 그 누군가는 기어이 저울에 무게를 단다. 인간은 그저 고깃덩어리일 뿐. 두 남녀의 성장 드라마를 지켜볼 아량은 없다. 비좁은 마음이다. 만남은 고정값이 아니거늘. 그냥 둘을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것일까. 자격을 상실한 지 오래인 내가 그런 생각을 해봤다.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떠올린 생각을 밤에 쓴다. 모순된 자아를 확인했다. 찝찝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