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작은누나가 유산한 적이 있다. 첫 임신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겉으론 덤덤해 보였다. 그래서 더 말을 건넬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위로해야 하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대해야 하나. 고민했다. 둘 다 답은 아니었다. 난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감정이라곤 배어있지 않은 무딘 얼굴로 가만히 앉아, 기약 없는 시간에 기대어 하루하루 누나의 고통이 깎여나가길 바라는 게 고작 내가 한 전부였다. 다행히 태아의 이름조차 붙이지 못했으니 상실의 기억도 언젠가는 휘발되리라 소원했다. 감히 그런 기대를 품었다. 여전히 난 모른다. 작은누나의 심정이 어땠는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모른다. 평생을 모를 일이다. 그저 첫째 둘째 잘 낳고 잘 기르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거라는 한가로운 망상만 할 뿐이다.
인간이라면 기필코 저지르고야 마는 사소한 죄악이 있다. 무관심이다. 엄밀히 말하면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무관심이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것이 사회의 풍속을 헤친다거나 사람들이 모여 손가락질할 만큼 큰 죄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살면서 우리는 꼭 한 번씩 그 죄업을 달성해내고야 만다. 각자 저지른 사소한 죄의 덩어리를 합치면 세상 그 어떤 죄악보다 거대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도 난 작디작은 덩어리를 또 보탠다. 의도된 무관심으로 하루를 헛되이 흘려보낸다. 언젠가 관계가 말살되면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할 걸 알면서도 말조차 하지 않는다. 텅 빈 공동에서 헛된 후회만 할 뿐이다. 그곳에서 존재는 후회하는 자, 나 자신밖에 없다.
무언의 죄는 결단코 처벌되는 법이 없다. 그래서는 해소될 여지가 없다. 내뱉지 않은 응어리는 체기처럼 가슴에 얹혀 도무지 내려갈 줄을 모른다. 의무를 배반한 굴레는 그런 것이다. 오래도록 붙박여 끝없이 나를 괴롭힌다.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토록 무섭다. 인간을 외롭게 만든다. 실언보다 무언이 더 큰 죄악일 수 있다는 실존적 증거를 나는 몸소 체득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누나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는 말’은 허울 좋은 핑계였다. 언제나 인간은 답을 찾음에도 골치 아픈 일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고야 말았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지난할지언정 지레짐작 포기하면 안 될 일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노쇠하는 부모님의 초라한 노구가 떠오른다. 언젠가 누나에게 느낀 감정을 두 분께도 품게 될까 두렵다. 하지만 난 그 두려움을 유예하는 데 급급하다. 파도처럼 떠밀려온 생각을 애써 바스러뜨린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따라서 오늘도 난 둘의 안부를 묻지 않았고 본가에 내려간 지도 오래전 일이다. 확정된 후회를 예측하면서도 일말의 대비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타파해야 할 마지막 미움의 낱말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대체 언제쯤 난 그들의 책장을 마련하려나. 덧없이 시간이 가고 또 간다. 늘어지는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