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깔끔떠냐”는 얘길 종종 듣는다. 나무라는 말이라기보단 내 행동 패턴을 보고 치는 장난일 텐데 가끔은 타박으로 들릴 때가 있는 게 사실이다. 웬만하면 웃음으로 넘기는데 자꾸 듣다 보면 제법 거슬린다. 짜증이 난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인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1. 어딘가로 들어가거나 나갈 때 문손잡이를 잡지 않는다. 유리 부분을 밀어 연다. 당겨서 열어야 하는 문이라면 되도록 사람들의 손길이 덜 닿았을 법한 곳을 찾는다. 손가락 세 개만 이용한다. 면적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엘리베이터 버튼은 손등으로 누르는데, 그렇다고 또 광범위하게 닿으면 안 된다. 한 손가락만 쓴다. 지하철 탈 때 교통카드가 카드 접촉면과 붙지 않도록 조심한다. 몇 센티 떨어뜨려도 인식되기 때문에 구태여 딱 붙여서 찍을 필요가 없다. 괜히 불특정 다수의 흔적과 만날 뿐이다.
2. 예전에 호기심에 공중화장실을 관찰한 적이 있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괜스레 악수라는 걸 하기 싫다. 손을 씻고 나가는 사람과 안 씻고 나가는 사람의 비율을 따져봤다. 장소를 달리하며 한 달간 평균을 내본 결과 50:50이었다. 악수를 금기시하는 현재 상황은 나에겐 유리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아, 그리고 지나다니는 동선에 소독제가 있다면 지나치지 않고 무조건 손에 짜셔 비벼댄다. 한동안 심할 때는 손이 엄청나게 건조해져서 살이 벗겨질 때가 있었다.
3. 혹여 싫어하는 사람과 접촉할 때면 마음은 내적 소름으로 무척이나 부산스럽다. 흡사 칠판 긁는 소리와 같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싫어하는 사람은 대개 일로 엮인 사람들이다. 성격이 더러운 사람들은 왠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추잡해 보인다. 나름 뻗댄다고 나를 툭툭 친다. 집에 와서 그의 손길이 닿았던 옷 군데군데에 치아염소산수를 뿌린다. 막 입는 옷은 바로 빨래통으로 직행이다. 내가 유달리 더 깨끗하다는 명징한 증거는 없다. 다만 이렇게 해야 오염된 기분이 제자리를 찾는 느낌이다.
4. 장 본 물건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지문이 묻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누가 어떻게 만졌을지 모르니 일단 닦아야 한다. 물티슈는 느낌이 안 산다. 닦는 노동을 아무리 반복해도 오염을 제거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불안하다. 알콜스왑은 면적이 작아 어느 세월에 닦나 싶어 귀찮다. 그럴 땐 엄마에게 받은 선물이 제격이다. 가히 혁명적인 물건이라 하겠다. 손 소독 티슈다. 엄마는 어디선지 열 개 정도를 받아 가져오셨다. 너가 생각났다며. 그걸 받고 며칠간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 비싸서 막 사지 못했던 물건이다. 쓰고 나면 잔여 먼지가 더덕더덕 닦아낸 표면에 붙는 게 흠이지만 면적이 커서 이것저것 아무거나 빨리 닦을 수 있어 편하다. 아마 나보다 이 물건을 잘 쓸 사람은 몇 없을 거다. 별것도 아닌데 가슴이 웅장해진다.
5. 코로나 이후엔 이 같은 증상들이 더 심해졌다. 특수 상황이 아니라면 치아염소산수를 뿌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필살기 혹은 궁극의 아이템이었다. 지금은 턱스크족이나 노마스크족을 만난 하루라면 불문곡직하고 옷가지에 들이붓듯 여기저기 분무한다. ㅡ 오해할까 말해두지만 카페나 식당은 잘 간다. 체온계를 재고 명부를 작성하는 일은 상황을 통제하는 바 두려움이 희석된다. ㅡ 비말이 혹시나 내 옷에서 서식하며 세균을 꽃 피우면 안 되니까. 핸드폰 소독용으로만 쓰던 알콜스왑의 용도도 늘어났다. 카페나 일터에서 꺼내놓았던 노트북도 적용 대상이다. 본래 물티슈로 닦았는데 팬데믹 시대에선 영 찝찝하다. 키보드와 터치패드 그리고 상하판을 골고루 닦아준다. 책은 더 심혈을 기울여 꼼꼼히 닦는다. 애정이 더 가는 물품인지라 앞면, 뒷면, 날개, 등까지 골고루 문댄다. 예전에 딱히 책을 닦아볼 생각은 안 했는데 요새는 어쩐지 그렇게 됐다.
6. 소비패턴이 변화했다. 이 글에서 여러 번 언급한 알콜스왑과 치아염소산수는 생활필수품이 됐다. 마스크와 지위를 같이한다. 절대 오링나면 안 된다. 쓱닷컴에서 미네랄 워터를 시키듯이 약국에서 알콜스왑을 사고 네이버 쇼핑에서 치아염소산수를 주문한다.
7. 이렇게 모아놓으니 자칫 내가 예민함의 집대성으로 보일까 우려된다. 하지만 난 유통기한이 석 달 지난 달걀도 잘 먹고, 한 달째 집 청소를 미루기도 하며, 베갯잇에 침을 흘리고 대충 물티슈로 응급처치만 한 채 몇 주를 더 머리에 대곤 한다. 이불 빨래가 귀찮아서 두 달 넘게 빨지 않기도. 물론 침대에서 과자 먹지 않기, 단 일 분이라도 외출했다면 반드시 샤워를 집행하는 나는 어느 정도 예민한 사람이 맞다.
8. 하지만 원래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와병을 하고 나서 변한 모습이다. 회복 속도가 더디고 심지어 극복하려는 모든 시도가 허위가 될 거라는 불안이 커질 때면, 그래서 평생 아픈 채로 살아야 하나 침잠하고 꺾인 나뭇가지처럼 몸이 생명력을 잃어갈 때면, 나는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통증이 내 몸에 이유 없는 앙갚음을 할수록 정신은 예민해졌다. 그릇 하나를 씻는 데 족히 한 시간이 걸렸고, 손은 하루에 수십 번은 닦아대어 여름인데도 손등이 하얗게 일어나곤 했다. 비정상인 몸 상태가 정상으로 되돌아오고 나서야 결벽증이 없어졌다. 다만 작금의 상황이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병 걸리면 피곤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몸이 위기 상황을 알고 묻혀 있던 트라우마를 자극한 것일지도.
9. 주절주절 나름의 합리화를 해봤지만 그래도 과해 보인다는 거 안다. 둔하게나마 눈치가 있는지라 사회생활 할 때는 티 안 낸다. 가까운 사람들만 이런 나를 알고 있다. 다들 “어휴 피곤해” 투덜댄다. 그래도 그게 내 캐릭터인데 어쩌나. 여자친구는 더러운 것보다 낫다고 한다. 다행이다 싶다가도 고개를 절레절레할 때면 미안하기도 하고.
10. 이렇게 산다고 집이 무균실이 되지는 않겠지. 딱히 건강해지지도 않을 거다. 하지만 가끔은 착각하면서 살 필요도 있지 않겠느냐는 공상을 한다. 나는 내 존재와 자아를 이런 식으로 확인하는 게 좋다. 내 행동을 교정할 생각은 없다. 누가 뭐라건. 다들 같이 살아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