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신자가 주는 끊임없는 영감
“유다, ‘계약’을 파기하고, 이 땅의 소금이 되기를 거부한 자.”
- <소금 조각> 실비 제르맹, 13p.
오늘은 유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려 합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유다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예수의 제자였던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를 팔아넘기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습니다.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대체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죄 중에 하나인 자살을 저지른 것이죠. 결국 그는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배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주 오래된 역사가 다 그렇긴 하지만, 배신자의 오명을 쓴 유다에 관한 이야기가 많지는 않은 탓에 유다의 배신은 여러 가지 의문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는 왜 배신을 했는가? 정말 돈 때문이었다면 겨우 은 30냥에 만족하지는 않았을 텐데? 예수는 어째서 유다가 배신하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만약 예수의 피로 세상을 구원해야만 했다면, 유다의 배신은 필요악이 아닌가? 그렇다면 유다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실제로도 유다에 관해서는 신학적인 논쟁이 많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유다에 관한 깊은 의문을 제기하거나 토론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짧은 지면으로는 그 의문들을 다루기 적합하지 않으니까요. 그것보다는 유다와 유다의 행위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다뤄보려 합니다.
유다에 관한 많은 픽션들이 있습니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는 사실상 주인공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고요. 보르헤스의 단편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민음사 <픽션들> 안에 수록되어 있습니다)에서도 유다를 재해석합니다. 거기에 <인간 실격>으로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 역시 <직소>라는 유다에 관한 소설을 쓰기도 했고요.
유다에 관한 이렇게 많은 픽션들이 있는 이유가 뭘까요? 왜 창작자들은 유다에게 끌리는 걸까요?
먼저, “배신”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한자로 쓰면 “背信”입니다. 이렇게 쓰면, “믿음에서 등 돌리다”는 뜻이 더 강렬하게 와닿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배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한 믿음, 또는 애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야기로 풀면 이렇게 됩니다.
서로를 신뢰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그 신뢰를 깨뜨렸다.
이 이야기에서 두 사람이 과거에 정말 강한 유대관계가 있었고, 신뢰를 깨뜨린 사람이 잔인하게 상대방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면 이야기는 한층 더 강렬해집니다. “배신”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과거의 신뢰관계, 현재의 파멸 등을 한 번에 담고 있는 무척 입체적인 단어입니다. 이 입체성은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왜 배신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단순한 배신자가 아닙니다. 브루투스도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암살했지만, 유다는 훨씬 특별한 존재죠.
성경에 기록된 유다와 예수의 관계는 굉장히 인상적이고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다던가, 유다에게 빵을 먹인다던가, 마치 뒷일을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네 할 일을 하라”라고 유다를 보내 주는 장면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유다 역시 배신의 키스로 예수를 고발하죠. 그의 최후가 정말 자살이었다면, 그것도 무척 인상적인 전개고요.
자세하지 못한 기록은 “배신의 이유”를 알 수 없게 하고, 커다란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습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유다는 정말 예수를 사랑했던 건지, 그의 배신은 필연적이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존 인물이었던 만큼, 당시의 정치적 상황까지 고려해 보면 “유다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하는 의문도 들고요.
이것은 단순히 “배신”이라는 키워드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유다라는 인물을 아주 입체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그를 단 한 가지 면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계속해서 그의 다른 면을 궁금해하고 질문을 던지며 우리 내면 속에서 유다라는 인물을 생생하게 그려내죠. 유다의 입체성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선과 악”, “신과 인간” 등의 질문과 모순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건 분명합니다. 입체성은 우리의 사고를 확장하는 좋은 수단이 됩니다.
여기서 생각을 뒤집어 보겠습니다.
“유다가 아닌 다른 무언가도 입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평범한 사물도 입체적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생각을 촉발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조금 복잡하게 느끼실 것 같아서 다음 단락에서 시각적인 이미지와 함께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후안 그리스의 <기타와 파이프>라는 그림입니다. 큐비즘이나 복잡한 미술 사조는 차치하더라도, 단순한 사물에서도 다양한 이미지가 나올 수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단순한 기타와 파이프의 정물을 그렸다면, 이렇게 기타와 파이프가 다양한 이미지로 파생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없었겠죠. 이 그림 속의 기타가 그러하듯이 사물도 입체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기타는 6개의 현이 달린 정면의 모습도 볼 수 있지만,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모습, 누군가가 들고 연주하는 모습, 또는 내면에 있는 텅 빈 공명통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물이 이토록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 역시도 이렇게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죠.
위의 그림도 마찬가지로 후안 그리스의 작품입니다. 제목은 <아침 식사>이고, 보시다시피 콜라주 형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콜라주 형식의 작품들은 하나의 대상을 놓고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사물의 입체적인 모습을 평면적인 회화로 풀어냈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영감을 받곤 합니다.
창작자들은 어떤 대상을 자신만의 도구로 풀어내야 합니다. 화가라면 그림으로, 작가라면 글로 풀어내야 하죠. 그런데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거의 언제나-입체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입체적인 대상을 다뤄야만,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생각할 거리를 줄 수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림이나 글, 음악이라는 표현 도구는 각자만의 제한이 있습니다. 아직은 오감을 동시에 체험한다던가, 입체적인 것을 한 번에 보여줄 수 있는 표현 방식은 나와있지 않죠(VR 기기가 상용화되면 가능할까요?). 콜라주 작품은 “2차원 평면이라는 제한 속에서 대상의 입체적인 면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창작자라면 콜라주 작품을 보고 어떤 영감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작권 때문에 이미지를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만, 조르주 브라크나 피카소의 콜라주 작품들도 좋은 영감을 줍니다. 제가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있어서 링크만 가져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링크의 그림은 정물화입니다.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10997
이 그림은 조르주 브라크가 표현한 콜라주 작품입니다. 위의 정물화와 비교해 보시면 관점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날 겁니다.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500381
이 작품을 보시면서 무심코 지나치던 대상을 콜라주 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을 해보시는 것도 흥미로운 지적 유희가 될 겁니다.
아래는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상상의 조각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면서 에피파니를 경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유다의 모습을 오려 붙여 콜라주를 만들어 본다고 합시다. 30가지의 종이조각으로 만들었다면, 그 30가지 조각의 유다는 모두 다를 겁니다. 은 30냥을 받는 손, 예수의 씻김을 받는 발, 스스로 매단 목, 마지막 키스를 하는 입술이 콜라주의 조각이 되겠지요. 이 콜라주의 마지막 조각은 유다의 눈입니다. 그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그 눈은 웃고 있을까요?
상상 속에서 유다의 눈을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즐겁게 사색할 거리를 안겨드렸으면 좋겠네요.
다음 주는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화음은 더하기일까 곱하기일까
- <내일 음악이 사라진다면> 양성원, 김민형, 126p.
위의 책을 읽으신 분이 있으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감을 잡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 음악이 사라진다면>은 첼리스트와 수학자의 대담집인데요,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니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주에 새로운 에피파니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