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나의 아파트
뉴욕의 어느 도로변에 서서 50층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한 아파트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이곳이 내가 묵을 곳이구나.’
예상보다 크고 세련되어 보이는 외관에 잠시 압도된 뒤, 핸드폰을 꺼내 들어 집주인에게 연락을 했다. 오분쯤 흘렀을까, 편안한 차림의 꾸밈없는 모습의 주인이 내려와 나를 반겼다. 친근하게 웃으며 오는 길이 힘들지 않았냐고 묻는 그녀는 나의 룸메이트이자, 여행 동안 좋은 언니가 되어 주었던 윤선 언니다.
내가 아파트에서 지내게 된 계기는 이렇다. 여행을 준비하며 숙소를 고르고 있었는데, 뉴욕에서 호스텔이나 호텔, 혹은 공유 숙소뿐만 아니라 아파트도 렌트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한 번도 아파트에 묵어본 적이 없던 나는 곧바로 흥미가 생겼다. 늘 여행지에서 현지인처럼 생활해보고 싶다는 갈망을 품고 있었는데, 아파트는 그 경험을 해보기에 좋은 선택지일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뉴욕은 집값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세입자가 룸메이트를 구해 월세를 아끼는 경우가 많다. 나처럼 8일 정도 단기로 지낼 룸메이트를 구하기도 하고, 몇 개월씩 같이 지낼 룸메이트를 구하기도 한다. 혹은 일정 기간 집을 비울 일이 생기면 그 기간 동안 그냥 빠져나가는 월세가 아까우니 다른 이들에게 대여해 주고 마찬가지로 돈을 아낀다. 그래서 나에게도 룸메이트가 생겼다.
어쨌든 나는 윤선 언니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43층으로 올라갔다. 아파트는 여러 세대가 옆으로 쭉 늘어서 있는 형태였다. 언니가 그중 하나의 문을 열자 밝은 실내가 보였는데, 나도 모르게 ‘와~’ 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마치 전망 좋은 루프탑 바에 온 것처럼 커다란 통창을 통해 맨해튼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와아! 이런 데서 살면 어떤 기분이에요? 절대 안 질릴 것 같아요.”
“네 진짜 안 질려요..”
도시 앞의 강물과 그걸 타고 흐르는 크루즈, 그리고 작은 섬까지,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게 아름다웠다. 내가 이렇게 도시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니. 그리고 아침 11시의 햇살은 내가 자게 될 침대와 테이블을 따사롭게 적시고 있었다. 나는 그 집에 첫눈에 반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그곳이 사람의 흔적이 묻어 있는 진짜 집이라는 점이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채 감정 따윈 묻어나지 않는 그런 호텔 방이 아니라 실제로 생활하는 사람의 삶이 담겨 있는 공간이라는 게 좋았다. 식재료가 쌓여 있는 부엌과 몇 켤레의 신발이 놓여 있는 신발장, 잡동사니가 진열돼 있는 수납장, 샤워 용품과 치약 칫솔과 헤어드라이어가 놓인 화장실. 내가 이렇게 소소하고 멋진 일상에 스며들게 될 것이라는 게 설렜다.
나에게 집 소개를 해준 뒤 언니는 잠시 외출을 했다. 난 세탁기에 빨래를 돌려놓고 집을 나섰다. 언니의 소개로 온 멕시코 음식점의 야외 좌석에 앉아 타코 두 개와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식당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는데, 차림새를 보아하니 대부분 관광객이라기보단 현지인 같았다. 문득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상상해 봤다.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는 여행자처럼 보일 것 같고, 맥주를 마실 때는 생활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 한층 밝고 짙어진 햇살을 등진 채 빨래를 개고, 나의 물건들을 서랍 속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집안일을 하고 내 물건을 채우자 그 집의 한편이 나의 공간이 되어가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관광이 아닌 생활이 시작된 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밤엔 드라마를 하나 틀어 놓고 윤선 언니와 두 시간 넘게 수다를 떨었다. 거실 바닥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면서 텔레비전의 배우들을 보고 낄낄거리고 있을 땐 친언니가 사는 서울 집에 놀러 갔을 때의 향수가 느껴졌다.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편안하고 즐거웠다. 룸메이트가 있어서 좋았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왼쪽 아킬레스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여행을 시작한 뒤로 거의 매일 2만 보 가까이를 걸었던 터라 며칠 전부터 발목이 아파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발목을 핑계 삼아 그날은 밖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집에만 있는 시간을 원하고 있었다. 이 아파트에서 지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하루쯤은 외출하지 않고 이 집을 누려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자꾸만 욕심이 생겨서, 집에만 있자니 뉴욕의 시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느끼지 않는 게 여행자로서 사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내내 들었다. 그러던 차에 아킬레스건도 아프겠다, 때마침 루프탑 수영장이 개방도 했겠다,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날 아침엔 버터 맥주와 칸탈로프 멜론, 그리고 블랙베리로 아침을 해결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햇볕을 쬐는데 이상하게도 금세 허기가 져 마트에서 사다 놓은 간편식 쌀국수를 먹었다. 오전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언니는 아침부터 화상 미팅이 있었는데, 연달아 잡혀 있는 스케줄에 아침도 못 먹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점심때쯤 언니가 방에서 나와 같이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다. 나는 한쪽에서 알리오올리오를 만들고, 언니는 닭 가슴살을 구웠다. 요리하는 소리와 잔잔한 대화로 부엌이 가득 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고, 낮부터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시며 대화하는 그 시간이 주말 오후처럼 편안하고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집에 있자는 결심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금 떠오르는 불안함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안에서 자꾸만 ‘그래서, 이렇게 하루를 보낼 거야? 집에만 있으면서?’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려고 해도, 막상 뉴욕에서의 하루를 그냥 날리는 것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또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언니가 타준 코코넛 커피와 커다란 타월, 책과 노트북을 들고 옥상으로 뚜벅뚜벅 걸어 올라갔다. 그리곤 수영장 벤치에 누워 느긋하게 일기를 썼다. 책도 읽었고, 햇살이 온몸을 태우는 줄도 모르는 채 맨해튼의 전경을 넋을 놓고 바라볼 땐 약간의 황홀함마저 느꼈다.
아파트에서 자는 마지막 날 밤엔 난 타코를 포장해 왔고, 윤선 언니는 술을 준비했다. 첫날처럼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 조명이 밝혀진 맨해튼을 바라볼 때, 오늘이 이 황홀한 광경을 보는 마지막 밤이라는 게 아쉬워졌다.
8일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커다란 통유리창을 통해 화려하고 바쁜 도시를 관찰하며 나와 다른 삶을 상상하다가 잠들었던 밤들, 동트는 걸 보려고 일찍 눈을 뜨던 아침과 해 질 녘 풍경을 보겠다며 헐레벌떡 뛰어서 귀가했던 저녁. 급하게 나갈 준비를 하던 나에게 언니가 권했던 샌드위치 한 입, 현관문 열쇠에 걸어 놓았던 열쇠고리, 집에 돌아왔을 때 언니의 방문 틈에서 새어 나오던 불빛. 아파트 엘리베이터 한편에 붙어 있던 짤막한 명언, 여러 번 방문한 카페, 어쩌다 들어간 서점, 자주 지나치던 건물 창가에 비친 내 모습, 매일 탔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지하철역의 출구. 그 모든 것과의 작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상을 벗어난 곳에서 또다시 일상을 맞이하고, 사람과 공간에 빨리도 정을 붙인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나에게 이렇게 깊이 각인된 이유는, 아마 내가 정말 그곳의 현지인처럼 살아봤기 때문인 것 같다. 그 특별한 경험을 마음속에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