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버 Leaver Sep 19. 2024

뉴욕에서 인터넷 없이 살아남기

가벼움의 미학



뉴욕 여행을 4일 남겨둔 시점부터 갑자기 유심 데이터가 안 터지기 시작했다. 길을 찾으려고 핸드폰 지도를 켰는데 인터넷 연결이 안 되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에서부터 미리 사 뒀던 유심은 데이터가 됐다 안 됐다 하기를 반복하며 여행 동안 여러 번 말썽을 부렸다. 그래서 한 번은 구매처에 문의해 유심 자체를 리셋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엔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한시바삐 구매처에 다시 문의를 하고 싶었지 한국은 밤인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반나절 동안 데이터 없이 다녀야 했다.

한국이 오전 9시가 되길 기다리는 동안 스멀스멀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돈을 주고 산 제품의 불량함에 잔뜩 언짢아하고 있다가 마침내 문의를 하게 되었을 땐, 하루 끝의 피로감과 데이터가 안 돼서 겪었던 불편함까지 겹친 상태였다. 그러면 안 됐지만, 직원에게 조금 짜증스럽게 물었다.

“왜 이렇게 데이터가 안 되나요? 며칠 전에도 리셋을 한번 했는데요.”


그런데 알고 보니 내 날짜 계산에 오류가 있었다. 17일 동안 쓸 유심을 샀어야 했는데 13일 치를 산 것이었다. 내가 잘못해 놓고 애먼 유심 회사를 욕하고 있었다. 난 날짜를 착각했다며 직원분에게 사과했다. 현지에서 유심을 새로 사는 방법이 있다는 대답을 듣고 상담을 마쳤는데, 남은 여행 기간이 겨우 3일이었기 때문에 새로 돈을 주고 사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간사하게도, 남의 잘못이 아닌 나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상황이라는 걸 안 뒤로는 어떻게 하면 데이터 없이도 알차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인지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남은 3일 동안은 그날그날 가려는 곳을 아침에 다 정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했다. 어떤 지하철을 타서 어디에서 내려야 하는지 경로도 미리 찾아 놓았다. 계획 없이 돌아다니는 걸 선호하는 나로서는 하루의 모든 일정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조금은 새로운 것이었다.


다행히도 뉴욕은 와이파이가 잘 되는 도시라서 공원, 카페, 쇼핑몰 어디서든 공짜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식당의 오픈 시간 같은 것들을 갑자기 검색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혹은 갑자기 비가 와서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지하철 노선을 모를 때, 물건의 가격을 검색해서 비교하고 싶은데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상점일 때엔 아날로그의 여행이 성가시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몇몇의 순간들을 제외하고선 데이터 없는 여행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나 자신이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쓸데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줄어드니까 지하철에 앉아서, 거리를 걸으면서, 어떤 명소에 들러서 조금이라도 더 관찰하거나 생각하게 된다는 걸 알았다. 또 다른 좋은 점은 SNS로 남의 사는 모습을 구경하는 대신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핸드폰으로 검색해서 어딘가를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이미 정하고 찾아본 곳을 가야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까 오히려 선택지가 줄어들어 마음이 홀가분하고 단순해지기도 했다. ‘여길 갈까? 아닌가 저기가 더 좋으려나?’라는 고민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줄어들었다.



사실 내가 들고 다니던 짐의 물리적인 무게는 변함이 없었다. 가방 속엔 무언가 덜어지지도, 더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핸드폰의 데이터는 무게가 없을 뿐 사실 가장 많은 걸 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하나에서 벗어나기만 했을 뿐인데도 여행이 가벼워지면서 동시에 질적으로는 풍성해졌다는 걸 통해 알 수 있었다.

우리를 당연하게 둘러싸고 있던 것들이 어느 날 사라져 버리는 때가 가끔씩 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우린 그것이 부재함을 통해 ‘아, 그게 정말 소중했구나.’를 깨달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인지, 그것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성찰해 보게 될 때도 있는 것 같다.


한 번은 카메라의 배터리가 아예 나가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된 날이 있었다. 카메라에 흥미가 많이 생겨 있었던 터라 처음엔 카메라 사진을 못 찍는다는 게 너무 아쉬웠는데, 온종일 돌아다니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편안하다는 걸 발견했다. 그동안에는 카메라로도 찍고, 핸드폰으로도 찍고, 카메라로 찍은 걸 또 핸드폰에 옮기고, 옮긴 사진들을 정리하는 일을 과제처럼 매일 수행했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조금 버거웠던 듯하다. 오히려 하루쯤 나에게 휴식을 준 기분이 들었다.  


또, 책을 들고 나서지 않았던 어느 날엔 읽을거리가 없어 심심할 걸로 생각했지만 책이 없으면 그만큼 사색을 하거나 관찰을 하게 되어서 심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책을 챙겨 나온 날들엔 무겁게 들고 다닌 보람이 있도록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부담을 갖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인터넷에 의존하지 않은 채 나흘간 돌아다녀 본 것은 여행하는 사람이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은 ‘가벼움’의 가치를 깨우치게 한 경험이었다. 어떤 것이 있으면 그 있음에 감사하고, 없다고 해서 지나치게 낙담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여행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가져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이후에 파리로 넘어가 시원시원하게 터지는 데이터를 사용하며 무척이나 행복했던 건 비밀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