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게 될까?
사실 파리는 다시 갈 것 같지 않은 여행지 중 하나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여행한 파리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난 사춘기였다. 아무리 유명하다는 장소에 데려다 놔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덥고 졸리다며 신경질을 부리던 시기였다. 이탈리아의 폼페이는 사막 같이 덥기만 하고, 독일은 우중충하고, 프랑스는 안 예쁘고 더럽다며 투정을 부렸다. 불편한 샌들을 신은 채로 언니와 함께 일행들의 맨 뒤에서 미적미적 걷다가 빨리 오라는 꾸지람을 듣던 철부지였다. 그 당시의 사진을 다시 꺼내 보면 카메라가 마치 철천지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표정이 사납기만 하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재미있는 게 있었다. 바로 함께 여행 온 일행 오빠를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때 했던 건 패키지여행이었는데, 일행이었던 언니 오빠 동생들과 짧은 시간 동안 굉장히 친해졌었다.
그중 난 모모 오빠(왜 모모 오빠라고 불렀는지는 잘 모르겠다)를 좋아했다. 열여섯의 내 눈에 스물한 살의 모모 오빠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어른들에게도 싹싹하고 또래들도 잘 챙기는 성격 좋은 모모 오빠를 우리 부모님을 비롯한 다른 어른들도 신뢰하고 예뻐했는데, 그때 내 눈엔 그가 나보다 한참 어른 같고 듬직해 보였던 것 같다.
난 그런 오빠를 졸졸 따라다녔다. 버스를 타면 모모 오빠 옆자리를 두고 언니와 내가 경쟁을 하곤 했는데, 언니를 제치고 간신히 옆자리를 쟁취하고선 자는 척 몰래 오빠의 어깨에 머리를 슬쩍 기댔던 장면과 내가 먹다 남긴 샌드위치를 아무렇지 않게 먹는 오빠에게 혼자 설렜던 장면이 생각난다. 사진을 찍을 때면 꼭 오빠 옆에서 찍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치근덕대는 나의 모습을 가족들이 다 알고 몰래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고 나서 너무 수치스러웠던 게 기억난다.
아마 그 보름 가까운 짧은 기간이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살면서 처음으로 느낀 때였다고 회상한다. 그러니 파리가 기억에 남지 않는 건 당연했다. 낭만적이라고 정평이 난 그 도시에 감탄하기엔 나 혼자서 몰래 키운 마음이 훨씬 더 낭만적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에펠탑의 야경을 보러 간다는 어른들을 따라가지 않고 언니 오빠들과 놀았던 좁은 방 한 칸에 서툴고 풋내 나는 마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 파리에 다시 오기로 결심한 이유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때문이었다.
영화는 대략 3분 간 음악과 함께 파리 시내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사실 그 3분만으로도 이미 파리에 갈 이유가 충분해진다. 낮은 옛날식 건물을 배경으로 하여 움직이는 자동차와 사람들, 에펠탑이 보이는 골목길 풍경, 공원에서 공을 던지며 놀거나 분수 앞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꽃집이 있는 거리, 크루즈가 떠 있는 센강, 카페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남자, 비 오는 날 분주히 움직이는 우산들, 빗물이 고여 조명이 반사되는 밤의 도로, 천천히 움직이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이런 장면들로 파리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만든 뒤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는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주인공이 파리에 여행을 오면서, 자정마다 1920년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 위대한 예술가들을 만나는 이야기다. 자신의 약혼녀에게 “1920년대의 비 오는 파리의 모습을 상상해 봐. 파리의 화가들과 작가들 하며.."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옛것에 대한 향수와 낭만이 있는 사람이지만, 그의 약혼녀와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현실적인 것에만 가치를 두며 허영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밤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파블로 피카소, 거트루드 스타인 같이 그 당시 파리로 모여든 저명한 예술가들을 만나 예술과 글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은 그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가 황금시대라고 생각했던 자신과 달리 막상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과거를 동경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과거에 대한 향수는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환상에 불과하며 결국 내가 있는 현재를 만족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 내용이다. 그러고 나서 알고 보니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약혼녀와 헤어진 뒤, 비에 젖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한 여자를 만나 비 오는 밤거리를 걸으며 영화는 끝난다.
틈만 나면 이 영화를 보던 시절에, 주인공이 걷는 비에 젖은 밤거리와 예스러운 상점, 그리고 거리를 아름답게 밝히는 주황색 가로등 같은 것들이 파리가 내 기억보다 훨씬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했다.
열여섯의 파리는 에펠탑에 올라가기 위해 줄을 기다리며 언니 오빠들과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과, 크루즈 선상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던 것, 그리고 개선문 앞에서 뜨거운 햇살에 눈살을 찌푸린 채 사진을 찍었던 것들만 기억에 남아 있지만, 다시 파리에 간다면 이번엔 무언가 다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또다시 파리다. 이번엔 스물여덟의 파리다. 나의 파리는 영화 같을까? 영화보다 낭만적일까? 그런 기대를 안고서 파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