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물결
살다 보면 내내 싫어했던 무언가가 한순간 좋아지거나, 오랫동안 좋아했던 것이 불시에 싫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절대 안 먹던 생굴이 갑자기 맛있게 느껴진다든가, 심심할 때마다 보곤 했던 영화 <디태치먼트>가 언젠가부터 거북해 아예 쳐다도 보지 않게 된다든가.
파리 여행을 하기 전까지 내가 내내 싫어했던 것은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파. 인파의 뜻을 풀면 ‘사람의 물결’이다. 그러니까 물결처럼 수많은 사람이란 뜻.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그 사람의 물결이 싫었다. 그 물결 속에 있다 보면 당연하게도 나 또한 물결의 일부가 되어 사람들과 어깨를 스치고, 부딪치고, 가까이 서게 되는데, 그게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불러왔다. 누군가 갑자기 불쑥 다가오거나, 숨결이 너무 가까이 닿거나, 실수로 나를 만지거나, 혹은 길이 넓은데도 굳이 나의 바로 뒤에서 걷는 타인이 있다거나. 그러면 나도 모르게 울컥, 화가 치솟는 것이었다. 직전까지 기분이 아무리 좋았더라도 화가 났던 것 같다.
이런 나를 대할 때마다 ‘와.. 나 진짜 성격 파탄자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필요한 ‘물리적 거리’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가족이나 연인 같이 친밀한 사이에서는 약 45cm, 지인이나 동료 정도의 사이에선 45~120cm,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1.2~3.6m가 적당하다는 말을 듣고, 내가 인파를 싫어하는 이유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붐비는 걸 선호하지 않는 나는, 여행을 가서도 사람이 많은 장소보단 적당한 여백이 있는 한적한 곳을 좋아했다. 어쩌다가 인파가 몰리는 관광지를 가게 되면 쉽게 피로감을 느꼈다. 사진 하나를 찍으려고 해도 오래 기다려야 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잽싸게 자리를 맡아야 하고, 음식을 주문하려 해도 기다림이 필요하고, 풍경 사진을 찍는데 웬 머리들이 앵글에 함께 잡히니까(하긴 누군들 이런 걸 좋아할까).
그랬던 내가 ‘사람의 물결’의 매력을 느끼게 된 날은, 파리에 도착한 첫째 날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풀고, 카페에 잠깐 앉았다가 인도 커리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커리에 갈릭 난을 담가 먹는데 불쑥, ‘오, 왠지 첫날이니까 랜드마크로 시작하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늦은 오후, 멀리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보이는 에펠탑을 향해 걸어갔다.
도착해 보니 사람이 꽤나 많았다. 난 계획대로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넓은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변엔 먼저 온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어떤 커플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었고, 잡지에서나 볼 법한 세련된 옷차림을 한 여자들은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누워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술을 사지 않겠느냐고 묻는 상인들도 보였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보통은 그렇게 삼삼오오 함께 있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으면 곧잘 외로워지고는 했는데, 그날은 외롭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곁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로 아늑함을 느꼈다면 모를까.
해가 떨어질수록 바람이 차가워져, 어깨에 걸치고 있던 니트를 입었다. 엉덩이를 탁탁 털고 일어나, 이번에는 불 켜진 에펠탑을 멀리서 바라보기 좋은 ‘트로카데로 광장’을 향해 움직였다. 20분가량 걸려 도착했을 땐 그곳에도 역시 먼저 온 사람들이 많았다. 난간에 걸터앉아 포옹하거나 입을 맞추거나 꽃을 선물하며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들. 사진을 찍는 사람들. 봄날의 파리를 즐기려는 물결이 일고 있었다. 나도 그 사이에 기대서서 사진을 찍으며 파리의 봄을 나름대로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때 불현듯, 어떤 장소는 반드시 사람으로 채워졌을 때 그 아름다움이 진가를 발휘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에펠탑이라는 그 구조물 자체를 보는 것도 멋지지만, 그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 혹은 멀리서 에펠탑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감탄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들,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 꽃을 선물 받고 감격하는 사람들, 깔깔거리며 장난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에펠탑을 더 빛나게 만들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아, 에펠탑은 이걸 보러 멀리서부터 설레는 마음을 품고 왔을 사람들의 모습까지 함께 감상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게 하나의 앵글에 담겨야 하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곳에 서서, 사람이 없이 텅 빈 거리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에펠탑을 상상해 봤다. 구경하는 사람 하나 없이, 홀린 듯 걸어가 카메라를 꺼내 드는 사람 하나 없이. 아름다울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파리의 강가와 잔디밭이 한산하다면? 그 또한 매력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을 것 같았다. 손을 꼭 잡고 걷는 노부부, 정성 들여 사진을 찍어주는 친구들, 무작정 잔디밭에 드러누워 낮잠을 청하는 사람들, 나란히 앉아 한 곳을 바라보며 그림 그리는 할아버지들. 그들이 있어 파리가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런 생각도 했다.
‘그래, 이 사람들도 먼 길을 걸어, 고된 여정을 거쳐 이곳에 왔겠지. 검푸른 하늘 밑에서 반짝이는 이 에펠탑을 보려고. 설레는 마음으로 왔겠지. 다들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 자리에서 애쓰며 살고들 있겠지. 그냥 다 나 같은 사람들이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나자, 낯간지럽지만 주변에 서 있는 타인들이 뭐랄까, 소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 다 그저 ‘나와 비슷하다‘라고 인식되고 나니까, 내 시야를 가로막는 ‘방해물’, 내 카메라 앵글 한구석에서 걸리적거리는 ’사물‘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사람’, 소중한 삶을 살고 있는 그냥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오히려 이 장소를 더 아름답게 빛내 주고 있는 고마운 존재.
분명 인파보단 여백을 좋아하는 나였는데, 그날 파리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이들 덕분에 ‘사람의 물결’도 매력적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람이 공간의 아름다움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북적이는 곳을 갔을 때 낯선 사람들이 내게 45cm만큼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이전보다 조금은 부드러운 생각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생겼다. ’그래, 이 사람들은 나한테 가까이 붙어서 불쾌감을 주거나 사진 찍는 데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아니라, 그냥 나와 마찬가지로 소중하고 귀한 시간을 보내는 존재들일 뿐인 거야. 이 사람들 덕분에 여기가 더 매력적일 수도 있는걸?‘이라는 생각. 미움 대신 동질감으로 바라보면, 어쩌면 귀여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느덧 밤이 되었다. 왠지 모르게 뿌듯한 마음을 품고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 사람들 많아서 안 무섭네.’라고 속으로 읊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