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버 Leaver Oct 31. 2024

비 오는 날엔 책과 와인이 있어야 한다

남프랑스 아비뇽



그날은 내내 맑았다가 저녁 즈음부터 부슬부슬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때 난 남프랑스의 아비뇽이라는 도시에 있었다. 온종일 밖에서 돌아다녔는데도 어쩐지 집에 있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집에서 전날 마시다 남은 와인이나 마실까 하다가도 어제와 똑같은 저녁을 보내기 아쉬워져 커다란 에코백에 와인을 쑤셔 넣고, 휴지와  젤리, 책 한 권을 함께 담았을 때에 비로소 신이 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다가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가 보았을 땐 눈앞에 론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변에 길게 뻗은 잔디밭은 빗물에 젖어 있었다. 나는 챙겨 온 휴지를 몇 장 깔고 앉았다.


비는 계속해서 가늘고 촘촘하게 부슬댔다. 해가 진 뒤 어스름하게 남아 있는 빛과 가로등의 조명에 의지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즈음 읽고 있던 책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였다. 이 책을 여행 동안 읽을 책으로 고르기까지 별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책장의 책들을 눈으로 훑다가 시선이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고등학생 때 한번 읽었던 게 기억에 좋게 남아 있었다. 십 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어도 재미있긴 마찬가지였다. 이십 대 동안 거쳐온 몇 번의 사랑 덕분에 고등학생 때와는 다른 깊이로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만 달랐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상대방의 아주 사소한 행동으로 사랑에 빠지고, 튀어나온 앞니마저 귀여워 자꾸 생각이 나고, 사랑이 식을 때쯤엔 그 앞니가 견딜 수 없게 짜증스러워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경험이 내 안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칼 위에 이슬처럼 내려앉는 빗물과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밑줄을 그으며 글자 뒤에 있는 무언가를 음미했다가, 젤리를 안주 삼아 종종 화이트 와인을 삼키는 동안 차분하고 고요한 시간이 흘러갔다.


젖은 풀밭에 앉아서 비를 맞으면서 술 마시고, 또 책을 읽는 있는 나를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지나가는 듯했다. 그런데 시선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특이한 날이었다.



얼마 뒤 엄마와 아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비를 입고 걸어왔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들은 강가에서 낚싯대를 들고 낚시를 하기 시작했고 엄마는 아들을 바라보며 바로 뒤 잔디밭에 걸터앉아 있었다. 낚시를 하다가 엄마에게 돌아가 무어라 종알거리는 아들과,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엄마의 모습이 기분을 한층 맑아지게 했다. 그들이 우비를 꺼내 입고 집 밖으로 어떻게 나왔을지 그 모습이 상상되었다. 비가 오지만 아들은 낚시가 하고 싶다고 조르고, 엄마는 못 이긴 듯 우비를 꺼내 주며 그럼 조금만 하고 돌아오자고 말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낚시를 했다. 책에 빠져 읽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이 떠나고 없자 왠지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중년의 한국 사람들을 마주쳤다. 한국인이냐고 묻기에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몇 마디의 짧은 말이 오가는 그 사이에 어른들은 나의 안전을 걱정했다. 해가 져서 위험하니 얼른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친근하게 말하고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이 문득 포근하고 정겨웠다. 그리고 그 따뜻한 걱정이 뉴욕에서의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뉴욕에서 사귄 친구 현아와 함께 브루클린 브리지에 가던 길이었다. 다리를 건너기 위해선 입구를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계속 입구를 찾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중동 여성분이 먼저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왔다. 그녀는 헤매는 우리에게 브루클린 브리지에 가는 길을 알려줬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돌아서는 우리의 뒷모습에 그녀는 “Be safe, girls!”라고 말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저 사람이 선뜻 건네는 도움의 손길과 생면부지인 우리가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이 진심인 것 같다.’라는.


어른들의 걱정 덕분에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 그리고 다정한 말 한마디의 힘이 잠깐 떠올랐다. 무심하고 건조하게 관계 맺던 내 삶에 가끔 이렇게 작은 돌들이 하나씩 던져지면서 다정함의 반경이 넓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때는 그런 말이 오지랖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의 것은 오지랖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같은 여자로서 건네는 안부의 손길이었다. 타인의 안위를 걱정하고 도움을 주려 하는 마음들을 문득 배운 저녁이었다.




비가 그친 뒤 조금 쌀쌀해진 공기를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열쇠를 돌려 현관문을 여는데 문득 평범하게 마무리될 것 같았던 하루가 조금 특별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빗물에 젖은 잔디, 와인, 책, 젤리, 우비를 입은 엄마와 아들, 그리고 한국 사람들.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앞으로도 비가 오는 날엔 책과 와인 한 병을 품에 안고 바깥으로 나가는 날들이 있었으면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