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 그 아름다운 도시에서
니스에 도착했다. 비가 온다던 일기 예보와 달리 하늘은 화창했다. 나는 숙소에 짐만 대충 풀고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영복 위에 흰 티를 겹쳐 입는 동안 툭하면 창밖을 내다보게 되었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비가 와 버릴 것만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눈으론 푸른 하늘을 보고 있지만 마음은 일기 예보를 의식하고 있었다.
해변에 나가려는 나에게 집주인 부부가 다정하게도 파라솔과 비치타월, 그리고 물놀이용 슬리퍼를 건네줬다. 내 커다란 가방 속엔 먹다 만 젤리와 책 한 권, 선글라스, 돗자리, 카메라, 그리고 집주인 부부의 넉넉한 마음들이 담겼다.
파라솔을 한쪽 팔에 끼고서 골목길 사이를 걸어 바다로 내려가는 10분 동안, 난 무척 흥분해 있었다. ‘날씨가 안 좋다고 했는데 이렇게 맑다고? 게다가 사람도 많이 없잖아? 아니, 저 건물 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또 뭐야? 나 참 미치겠네.’ 하면서, 마치 고작 10분 사이에 바다가 몽땅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한시바삐 바다에 가고 싶어 노심초사해지고 말았다. 마지막쯤엔 거의 뛰다시피 해서 바닷가 자갈밭에 도착했다.
파라솔은 내 멋대로 세웠다. 생전 처음 사용해 것이기에 파라솔 기둥 옆에 무작정 커다란 돌들을 쌓아 넘어지지 않게 고정시키는 정도였다. 모양새는 조금 웃겼지만 그래도 제법 튼튼하게 세워졌다. 그 아래 돗자리를 깔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가방과 돌로 돗자리의 가장자리를 고정한 뒤 잠시 숨을 골랐다. 휙 둘러본 주변엔 거리를 알록달록하게 수놓은 꽃과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길가에 여유롭게 늘어선 카페와 식당, 그리고 내 옆에 파라솔을 펼치고 느긋하게 누워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차오르는 걸 느꼈다.
겉옷을 벗고 곧장 들어간 바닷물은 적당히 시원했고, 군데군데 떠다니는 구름이 햇볕을 막아줘 눈부시지 않았다. 발이 닿지 않는 곳까지 나가는 건 무서워하는 터라 뭍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혼자 개구리헤엄을 쳤다. 손녀들과 물속에서 놀아 주는 할머니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문득 바다에서 혼자 있는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 베트남의 나트랑 바다 이후로 처음이었다. 바다에서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기억의 필름 속 4년 전 어딘가를 더듬어 보았다. 날카로운 바람을 피해 목도리를 꽁꽁 둘러메고 다니던 계절이었다. 그즈음 난 혼자서 열심히 수영장을 다녔다. 수영을 시작한 계기는 사소하면서도 충동적이었다. 당시 나는 영어 공부를 위해 영어 채팅 앱으로 외국인들과 대화를 하는 게 취미였는데, 거기서 알게 된 어떤 친구가 “나는 굉장히 내성적이지만,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취미 연극을 시작하면서 무대 위에서만큼은 내가 굉장히 자유롭고 활달하다는 걸 알았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나는 수영을 해야겠다.’라는 강렬한 결심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그 외국인 친구가 살면서 모르고 있었던 자기의 또 다른 세계를 연극을 통해 발견한 것처럼, 나도 물이라는 세계로 나를 넓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매끄럽지 않은 그 사고의 연결을 난 마치 계시처럼 느꼈고, 그 즉시 옷을 입고 수경을 사고 수영장에 갔다.
그때 내가 할 줄 아는 수영이라곤 어렸을 때 계곡에서 아빠가 가르쳐 준 수영이 전부였는데, 물속에서 숨을 참고 그냥 팔다리를 막 휘저어서 나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었던 수영은 개구리헤엄이었다. 예전에 크로아티아에 갔을 때, 깊은 호수 한가운데에서 머리만 내놓고 외국인들이 개구리헤엄을 치면서 노는 모습이 마음속에 오랫동안 동경하는 장면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딱히 강습을 받지는 않았다. “개구리헤엄도 가르쳐 주시나요?”라고 하는 게 멋쩍기도 하고, 혼자서 터득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혼자 거의 매일 수영장을 다니며 열심히 연습했다. 처음엔 아예 안 되다가 가까스로 터득한 건 팔은 개구리처럼, 다리는 개처럼 허우적거리는 ‘반개반구’ 영법(내가 지었다)이었다.
그렇게 어설프게나마 머리를 내놓고 헤엄치는 방법을 익힌 후 베트남 나트랑 여행을 가게 되었고, 혼자서 바다에서 살이 새빨갛게 탈 만큼 오랫동안 헤엄치면서 자유롭고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부터 바다 수영이 좋았다. 어쨌든 그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혼자서 바다에서 머물며 그때만큼의 자유로움과 밑도 끝도 없는 행복, 이 순간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젖은 몸을 대충 닦았다. 책을 읽으면서 그날의 첫 끼로 젤리를 씹고 있자니 슬슬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잠깐 눈을 감고 있을 요량으로 누웠는데, 일어나 보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더니 조금 전에 나와 함께 물놀이를 하던 사람들이 다 자고 있어서, ‘누가 바닷물에 뭐 탔나?’라는 되지도 않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도 서너 시간을 그 돗자리 위에 있었다. 나는 엎드려서 책을 읽거나 한국에 있는 남자친구와 마침 시차가 맞아 영상 통화를 하고, 젤리를 먹으며 다섯 시간을 지루할 틈 없이 놀았다.
종종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 구경도 했는데, 내 시선을 사로잡은 장면이 있었다. 바로 상의를 탈의한 몇몇 여자들이었다. 처음에는 수영복 하의만 입은 채 태닝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 내가 잘못 봤나 생각했고,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나자 꽤나 당황스러웠다. 그곳이 누드 비치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에 볕을 쬐고 있는 걸 계속 보다 보니, 나도 곧 그게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젖가슴을 드러내고 옷을 갈아입어도 가족 중 그 누구도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멋쩍어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주변의 어떤 사람들도 쳐다보거나 의식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들 자기 몸의 생김새를 의식하지 않는 듯, 살이 늘어져도 셀룰라이트가 있어도 뱃살이 튀어나와도 나이가 많아도 누구나 털털하게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그들은 몸이 성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냥 신체의 일부일 뿐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의 감정이 기억에 남는다. 나도 내 몸의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과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내 세계 속 관념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충격. 그 강렬한 감정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하나로 콕 집을 수 없는 이유들로 나는 니스의 바다와 사랑에 빠졌다. 아름다운 풍경, 그곳에서 회상한 4년 전 겨울, 머리를 새롭게 파고든 생각, 주변에 한가로이 노는 사람들.. 그것들을 온전히 느끼며 홀로 있는 동안 내 마음의 어떤 부분들이 조금 정화되었던 것 같다.
끝없이 푸른 하늘만큼이나 나 자신도 새로이 푸르렀던 것 같다.